어학연수의 슬럼프는 3개월, 6개월, 9개월 순서로 온다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오기 전에야 뭐, 저런 말 따위 6개월밖에 안나가있는데 슬럼프라는게 오겠어?하며 9개월은 이해가 가네 하면서 웃어 넘기고 말았지만 그것 참 다른 사람들 말을 귀담아 들을 줄 알아야 한다니까? 4월은 정말 향수병의 달이었다.
딱히 나쁜 일도 없고 수업도 고만고만하고 일상도 안정되어 있었지만 재밌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영어로 어설프게 말하는게 지겹고, 혼자 들어가는 집은 너무 싫고 그런거다. '한국이라면 웃으면서 날 반겨줄 가족들이 있는데, 속 깊은 이야기를 편안하게 말할 수 있는 친구들도 있는데 난 영어를 엄청 잘하기 위해서 여기 온 것도 아닌데, 한국 가서 학교 다니고 일상 생활 하고싶다'의 무한 루프에 빠져서 집에 있을 때에도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사도 학원에서 사람들이랑 얘기를 해도 온통 이 생각 뿐이었다. 심지어 한국에서 너무 큰 사고가 나 버려서 더욱 더 한국으로 가고 싶었다. 내가 한국 소식 들을 곳은 인터넷이랑 방송 뿐인데 온통 그 얘기만 하니 마치 내가 아는 한국이라는 세상이 전부 무너져 내린 것 처럼 느껴졌다. 뉴스를 보고 울음을 참는 나를 아무라도 달래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다 풀어버렸다. 영국 방송에 영어 위주로만 지내려던거 다 버리고 한국 팟캐스트부터 다운받았다. 한국 예능도 보고싶은 만큼 실컷 봤고 학원도 가기 싫으면 그냥 빠져버렸다. 학원에서 왜 이렇게 오전 수업을 빠지냐는 물음에 그냥 난 내 시간이 좀 갖고 싶고 영어는 꼭 엄청나게 늘지 않아도 상관 없다 했다. 담당 선생님과 조율 하에 -어차피 환불이 안되는 건 알고 있으니 그냥 나 하고 싶은대로 해 달라고 했다- 오후 수업만 가도 연락을 따로 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고, 한동안 요리 및 청소에 열중하는 오전시간을 보냈다.
한 3주 정도 지난 것 같다. 요 근래 영어가 좀 늘었다는 기분이 든다. 영어가 늘었다기 보다는 자신감이 늘은 것 같다. 한국 방송에 흥미가 사라졌다. 다시 이 영국 사회에서 사는게 즐겁다.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고 잘 지내다 가야겠다는 기분이 다시 돌아와서 영국 라디오를 다시 틀고 영어 책을 즐겁게 읽는다. 다행이다. 3개월이나 남았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3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를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 일 없었던 것 처럼 다시 즐거워 하는 나를 느낀다. 그게 3개월차 슬럼프였다는걸 지나가 보고 나니까 알겠는 거다. 6개월차 슬럼프가 올만할 때 쯤 내가 이곳을 떠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좀 든다. 여하튼 지금, 오늘의 난 평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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