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가족 여행으로 순천에 갔다. 하루를 투자해 선암사에서 송광사까지 걸었다. 여러 코스 중 그나마 쉽다는 천년불심 길을 올랐는데 가족 모두 너덜너덜해져 내려왔다. 당연히 아무 사진도 찍지 못했다(하나쯤 찍어서 여기에 첨부하면 좋으련만). 중간에 먹었던 보리밥 사진을 찍었으면 좋았겠다고 다 먹고 나서야 간신히 생각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했단 사실도 오후 등반으로 모두 잊고 나중에서야 기억해냈지만.
부모님은 주말마다 둘레길을 걸으셨기에 잘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여행을 가기 전부터 나는 낙오가 될 것 같으니 앞에서 기다려 달라 신신당부하고, 힘들면 중간에 내려와 택시를 타겠다며 엄포도 놓았다. 그런데 말이야. 의외로 등산이 나쁘지 않았다. 산에서 땀 흘리는 삼삼한 기분이 좋았다. 깔딱 고개를 넘느라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게 참을만하기도 하고 성취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오르막길을 재미있어 하기는 처음이라 서울에 가면 등산을 해볼까 싶었다(실행까지는 억겁의 시간이 걸리겠지). 대신 내리막길은 많이 힘들었는데, 나이 탓인지 과중한 체중 덕인지 쿵쿵 내려가다 보면 영 무릎이 아팠다. 보폭은 또 어찌나 작은지. 오종종종 걸어가는 내 옆으로 날쌘돌이 어르신들은 파바박 뛰어가셨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이어진 산행 중간에 먹을 수 있었던 보리밥은 천국의 음식이었다. 원래도 보리밥이나 나물비빔밥을 좋아하는 터라 기대가 컸지만 정말 만족스러웠어. 안주인분이 직접 만든 나물 10가지 정도를 그릇마다 수북하게 쌓아줬고 찌그러진 양푼에서는 직접 담근 고추장과 참기름 향이 진동했다. 그 덕에 온 가족이 머슴밥처럼 담아준 보리밥을 싹싹 비우고 맥주도 한 잔 쭈욱 들이켰다(캬-하!).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신도 나고 힘도 난 엄마는 주인에게 순천에서 먹은 것 중 제일 맛있었다고 진심으로 말씀드렸다. 그 말을 들은 주인 양반은 우리에게 편안한 길을 알려 주는 친절을 베푸셨고(편안한 길이 시급해 보이는 모습이었을 게다).
도합 7시간 정도의 등반은 오르막도 많고 내리막도 많아서 나는 하루 종일 황소처럼 콧김을 뿜었다. 그래도 낙오는 되지 않았다. 사실 산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부모님보다 앞섰다. 분명 어렸을 땐 아빠가 저만치 가서는 빨리 오라며 나를 불렀었는데, 이번엔 내가 저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됐네. 부모님의 느린 속도가 짠하기도 하고 그래도 저 속도로 주말마다 열심히 다니셨구나 싶었다. 올라갈 때는 다리가 불편한 아빠가 땀을 비 오듯 흘리셔서 엄마가 수분 보충이며 당 보충을 섬세하게 챙겼다. 내려올 때는 보폭이 작고 무릎도 아파 빨리 내려가지 못하는 엄마를 위해 아빠가 뒤에서 든든하게 기다려 주시더라. 두 분은 자주 아웅다웅하면서도 서로를 열심히 챙긴다. 나도 50대쯤에는 부모님 같은 부부가 될 수 있을까? 둘레길을 함께 오래 걸을 수 있는 반려자를 만나면 성공한 인생이겠다고 몰래 생각했다. 당장 옆에 짝이 없었던 언니와 나는 둘이서 앞만 보고 열심히 걸었지만 뭐(남자 친구야 뭐하니 등산 가자).
짧은 여행이었지만 정말 어마어마한 추억을 들고 돌아왔다. 앞으로 우리는 등산을 이야기할 때마다 두고두고 순천을 떠올릴 거다. 숙소의 편안함과 시원한 맥주도 얘기하겠지. 남들이 다 우리를 추월해가기는 했어도 말이야, 우리가 그래도 포기 안 하고 끝까지 갔잖아! 그때 어떤 가족은 중간에 돌아갔는데 그지! 극기 훈련이라 농담하며 괴로워했던 뜨거운 여행이었지만 확실히 극한의 보람도 함께 얻었다. 가족은 참 소중하다. 당연한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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