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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ELING

2019.12.16. 둔돌이랑 오래 행복해야지

by 푸휴푸퓨 2019.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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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서운함을 토로한다. 너는 미안하다는 말 말고는 해 줄 말이 없을 정도로 스스로가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하지 말라고 한다. 반복되기만 하고 해결은 없으니까. 더욱 할 말이 없는 너는 우물쭈물하며 침묵을 지킨다. 나는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하는 이 침묵이 무거워 그만 집에 가자고 말한다. 패딩을 챙겨 입고 컵을 치운다.

 

  명동이니 롯데백화점 앞에서 버스를 타야하는데 롯데백화점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나오는지 나는 모른다. 늘 그렇듯 네가 나를 이끌고 간다. 오른쪽 골목 끝에 백화점이 보이는데 너는 그대로 직진한다. 네가 내 손과 머리를 슬프게 쓰다듬고 있으니까, 나는 혹시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말을 못하고 있나 하는 기대를 해 본다. 아니다. 걸음을 멈춰선 너는 명동에서 방향 찾기의 원점은 명동역이라며 지도를 켜고 있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롯데백화점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로 나를 안내한다. 헛웃음이 나온다. 시무룩하다가 갑자기 핫핫 웃는 나를 보며 너도 웃는다. 우리 지금 집에 가고 있어. 진짜 웃음이 나와 내가. 너는 솔직히 말한다며 사실 지금 왜 웃는지 영문을 모르겠단다. 그냥 내가 웃어서 웃는대. 집에 가지 않고 맥주를 한 잔 마시기로 한다. 롯데백화점은 저쪽에 잘 서있다.

 

 

  우리는 맥주잔을 앞에 두고 앉는다. , 버스를 타는 순간부터 시작해보자. 내가 버스를 타. 그리고 안녕 잘 가 하고 인사를 해. 그리고 가. 그럼 넌 어떻게 할 거야? 가만히 있을 거란다. 내가 풀릴 때까지 말을 걸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다음날이 되면 내가 아침 인사를 할 때까지 기다린단다. 그럼 그땐 마음이 풀렸다는 거니까 일상적인 대화를 하면서 넘어가보겠단다. , 그럼 나는 내 감정을 알아서 정리하고 쪼로로 돌아와야 하는 거야? 내 마음은 중요하지가 않아? 아니면 내가 연락이 며칠이나 오지 않으면 그냥 그대로 연락은 안 해? 다급한 넌 아니 그건 아니란다. . 그럼 이 답은 아닌 거네.

 

  다시 버스를 타는 순간부터 시작한다. , 내가 버스를 타. 어떻게 할 거야? 같이 타고 우리 집에 함께 온단다. 버스를 타서는 손을 잡고 있을 거라며. 근데 말은 할 수 없단다. 아니 그럼 내가 아파트 현관 앞에서 안녕 잘 가 하고 집에 들어가 버릴 텐데? 그러고 너도 집에 가면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지는 상황과 다를 바가 없잖아. 아니아니, 너는 급하게 자기는 집에 가지 않고 현관 앞에 계속 있을 거란다. 쪼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겠대. 아이구, 불쌍한 우리 아가. 혼자 그렇게 울고 있으면 나는 네가 울고 있는 걸 몰라. 그럼 아무 소용이 없잖아?

 

  지금부터는 객관식으로 해보기로 한다. 1, 저층에서 사는 내 귀에 들릴 만큼 큰 소리로 현관에서 통곡한다. 2, 전화를 한다. 3, 카톡에 점점점점점을 어마어마하게 포함해서 나 아직 집에 안 갔다고, 현관에서 울고 있다고 메시지를 보내본다. 너는 간신히 3번을 고른다. 그래, 그 메시지를 보고 내가 다시 내려왔어, 그럼 무슨 말을 해야겠어? 너는 괴로워하다가 솔직한 심정을 말한다. 너는 아까 내가 너에게 이야기할 때부터 자신이 너무 잘못한 것 같아서 머릿속이 새하얗단다. 아무 말도 생각이 나지 않는데 혹시 괜찮으면 버스에서부터 어떻게 해야 잘 하는 건지 설명을 부탁한단다. 남자친구 여자친구를 떠나 인류애적 관점으로 볼 때 애를 쓰는 네 모습이 안쓰럽다. 그래, 여기까지만 해도 겨우 잘 따라왔다. 쭈구리고 혼자 앉아서 울지는 말자 우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너는 시종일관 뜨겁다며 열심히 치킨을 찢어주고 있다.

 

  나는 내가 서운함과 슬픔을 오래 끌 수 없음을 안다. 우물쭈물 괴로워하는 네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그냥 내가 졌다. 나는 참 풀기 쉬운 여자친구야. 네 역량으로 볼 때 오늘의 나를 달래는 일이 너무 어려운 문제임엔 분명하지만, 이정도면 정말 쉬운 수준인 것도 알아줬으면 해. , 내가 집에 가자며 몸을 돌려 일어서면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을 알려준다. 미안해 OO아 가지마. 침묵으로 나를 답답하다 못해 불안하게 만든 너는 내 말을 잘 따라하고 겨우 한 마디 한다. 네가 생각해도 자신이 잘못했기에 미안하다고 하고 싶은데 미안하단 말은 하지 말라고 하니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은 거라 생각했다고(아니 그 말이 어떻게 그 뜻이 되는가!). 이렇게 먼저 말해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풀고 집에 가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집에 갈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부둥부둥 너를 안고 다시 말한다. 아까 롯데백화점 찾아가면서 내가 너한테 건넸던 말, 찡찡댄다고 나 버리지 말라고. 그렇게 냅다 집으로 내다 버리지 말라고. 네가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럴 일은 없어. 네가 항상 신뢰를 주는데도 나는 쉽게 불안해한다. 불안하면 동굴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싫어. 나를 세상에 꺼내줘.

 

  나는 네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말 말고 다른 이야기. 급하게 미안하다 하고 또 같은 행동을 반복할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왜 그랬는지 네 진심과 생각을 알면 서로 맞추면 되니까. 혹 이견이 있으면 당장은 좀 불협화음이 있더라도 결국은 맞추게 될 테니까. 진정한 이해 없는 성급한 미안하다는 지금도 나중에도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힘들게 겨우 전달했다. 그래도 포인트는 전달했다에 있다. 전달에 성공했다.

 

  아, 그래서 결국 알게 된 너의 (무심하고 사소한) 진심은 무엇이었느냐 하면, 크리스마스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나를 보고 크리스마스는 그냥 데이트하는 어느 하루라고 단순히 생각했다는 거. 그래서 작년의 미안함을 쉽게 잊고 올해 또 데이트 대신 가족 저녁을 먼저 떠올렸다는 거. 이 간단한 이야기 하나를 듣기 위해 그렇게 돌고 돌았다. 둔한 돌탱이 자식. 너에게 두 개의 벌을 내렸다. 하나, 최소 연말까지 너를 둔돌이라 부른다. , 절대 안 들려주던 오카리나 연주를 독주로 들려준다. 너는 약 일주일 간 처량하게 연습하고 내 앞에서 솜씨자랑을 한 후 이불킥을 해 댈 것이다. 생각만 해도 뿌듯하군. 그런 너를 조롱하며 마음껏 괴롭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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