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코로나가 기승이다. 서울에 900만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음을 생각하면 서울 내 확진자 수는 아주 적지만, 두려움이 엄습하는 건 어쩔 수 없다. 경상도 지역이 난리다 보니 자연스레 친가 식구들에게 마음이 쓰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마도 계셨다면 가장 걱정했을 우리 할머니가 이제는 안전하다는 점. 할머니 안녕? 난 요즘도 할머니 생각을 자주 해.
2.
할머니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2월 어느 날엔가 에버노트를 사용하느라 잘 들어가지 않았던 삼성 어플에서 작년 6월에 급하게 써 둔 메모를 발견했다. 할머니를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남겨두고 싶던 모습을 적어둔 짧은 목록이었다. 차마 글로 쓸 만큼 할머니 생각을 오래 할 자신이 없었다. 목록을 보자마자 그때의 급하고도 아픈 마음이 생각나서 얼른 창을 닫았다. 나는 아직도 그것들을 쓸 수 없다.
아프다 외면하고 있다가는 다 잊어버릴까봐 걱정이 됐다. 나만 편하자고 할머니를 외면하는 것만 같았다. 전전긍긍하던 차에 책에서 위안을 얻었다.
어떤 일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다음 발걸음을 내딛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상처에 대해 쓸 수 있다는 말은 상처를 잊었다는 뜻이 아니라 상처와 함께 사는 법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당신이 도저히 글로 옮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일을, 언제가 되면 글로 옮길 수 있을까. 서두르지 말자. 이것은 이기고 지는 배틀이 아니다.
- 이다혜,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할머니. 나는 여전히 내가 할머니의 목소리와 냄새를 잊어버릴까 봐 겁이 나. 잊어도 괜찮은 때가 올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여기에는 곧 봄이 올거야. 3월이니까.
3.
마스크를 계속 쓰다보니 안경에 김이 서리지 않게 착용하는 기술이 늘었다. 나도 내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김이 안 낀단 말이지.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도 변화하는 나의 습성이 신기하다.
4.
작년 이후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늘었다. 그전까지는 죽음이 무언지 몰랐기에 실제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집안의 두 어른과 이별 후 마음을 추스르고서도 죽음에 대해 문득 떠올리는 순간이 늘다가 최근에는 급기야 고요를 못 견디는 나를 깨달았다. 너무 많은 소리에 힘겨워하다 문득 알았지 뭐야. 고요한 순간에 떠오르는 상념이 두렵다.
조금 반체제적인(?)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돌아가는 세계가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누가 보아도 중국이 발표하는 사망자 수가 정확치 않은데, 많은 경제 관련 뉴스에서는 그 수를 기반으로 바이러스가 잡혀간다거나 하며 이후 경제 상황을 가늠한다. 결국 모든 건 기록에 남아야만 진실이겠지. 전 세계가 합심해서 이면을 외면한다는 생각과 세상은 아주 오랫동안 이렇게 굴러왔다는 생각이 교차한다. 소시민이 어찌할 수 없는 힘의 흐름이라며 절로 체념하는 내가 있다. 마음이 헛헛하다. 내겐 죽음 하나하나가 이렇게 아픈데 인간 전체에게는 동전 몇 닢만 못한 일이라니.
바이러스로 인해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지구의 어느 곳에서 마지막 말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사그라졌을 생명에게 슬픔과 위로를 보낸다. 바이러스도 싫고 시스템도 사회도 이 모든 걸 만들어낸 인류에게도 환멸이 나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람에 대한 애정을 버릴 수 없다. 많은 이들에게 고요와 평안이 함께하기를. 나를 포함해서.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4.15. 올 봄은 쉽지 않구나 (0) | 2020.04.15 |
---|---|
2020.3.18. 3월의 넷플릭스 시청기 (0) | 2020.03.18 |
2020.2.17. 글쓰기 30년 인생 플랜을 나도 모르게 시작했다 (0) | 2020.02.17 |
2020.2.11. 시간은 계속 가고 나도 계속 간다 (0) | 2020.02.11 |
2020.2.7. 공허에는 덕질을 추천합니다 (0) | 2020.02.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