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한 달간 블로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할 기분이 아니어서,라고 하면 너무 무책임할까. 간단히 근황을 정리해 둔다. 왜 말할 기분이 아닌지 정도는 말해둬야 미래의 내가 수긍을 해주지 않겠어.
1.
코로나. 코로나 코로나 코로나. 이 날씨 좋은 시절에 밖을 제대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은 정말이지 재앙이다. 코로나 사태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중국 어느 지역의 괴담을 듣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내 주변으로 바짝 다가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작하면서도 잠시나마 운동을 합법적으로 가지 않아도 되니 기쁘다는 생각 정도만 했다(어째서 나는 돈을 주고 고통을 구입하는가). 이렇게 생활이 통째로 바뀌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단 말이다.
달리는 시간을 조금 늘려가던 참이었다. 늘어가는 시간을 보며 헬스장에서 조용히 뿌듯했다. 일상에서도 잠깐 뛸 순간이 오면 가뿐하게 계단이며 언덕을 달려 올랐다. 횡단보도를 통통 튀며 건너면서는 행복하다 생각도 했지. 하지만 이제 체력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헉헉대고 싶지 않은데, 뛰러 갈 곳이 없다. 몸이 축 가라앉는다. 오랫동안 공들여 쌓은 저녁 루틴의 붕괴는 말할 필요도 없다.
2.
승진에서 떨어졌다. 어느 집단 내에서 점수를 받아야 하는 순간에 처음으로 평균 이하의 점수를 받았다는 사실이 증명된 셈이다.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 생각하면서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살았단 생각을 했다. 그래, 나는 지극히 평범하다. 대단치 않다.
같이 승진을 하지 못한 착한 동기가 발표가 나기 전에 미리 언질을 주었다. 고마웠다. 덕분에 발표가 나는 순간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는데도 소식을 들으니 온통 세상이 흔들렸다. 화가 나고 스스로가 초라했다. 이제 모두가 나를 한심해하겠다며 자학했지. 나는 가치라곤 없는 사람인 양 싶었다. 와, 이 지구의 수많은 직장인 대다수가 이 기분을 견뎌가며 직장에서 일하고 있구나? 수능을 보기 직전 수능을 이미 본 어른들이 존경스러웠던 마음으로 직장인을 생각했다. 나는 이걸 견딜 수가 없을 기분인데. 이게 뭐 하는 상황이야.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생각을 정리했다. 무엇에 분노하는지 순서대로 짚었다. 첫 번째, 나는 빠른 승진을 원하는가? 전혀 원하지 않았다. 이 조직의 높은 자리를 탐내지 않았기 때문에 -내 기준으로는 탐낼 가치가 별로 없어 보였다- 직장에의 헌신 대신 편안한 일상을 집어 들었다. 흠, 그럼 애초부터 원하지도 않는 무언가를 얻지 못했다고 굳이 화낼 필요가 있어? 없지. 그렇다면 승진하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에 화가 날 일은 없었다. 두 번째, 나를 승진시키지 않겠다는 판단이 나를 결정하는가? '승진하지 못한' 나는 쓸모없어 보였지만 애초에 나의 가치를 승진으로 판단할 필요가 없었다. 조직에서 일을 하다 보면 결정의 불합리성을 수없이 목격한다. 모든 조직이 그렇다는 걸 대충 알기에 큰 흠결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다만 이 승진 판단이라고 절대적으로 완벽했다 여길 이유도 없지. 원래부터 믿지 않는 판단의 주체가 내린 판단을 굳이 이번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내 기분을 지배하게 방치해서는 안 되겠구나. 빠져나와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빠져나왔다.
승진하지 못해 분노한 또다른 동기가 나의 이야기를 듣더니 대단한 긍정주의이자 대단한 정신승리라 말했다. 무엇이든 어때. 지난 주말에 읽던 책에서 내 마음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반가웠다.
사실 직장에서 중요한 사람이 되려면 그만큼 헌신을 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전혀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 (중략)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려면 중요하지 않은 나를 견뎌야 한다.
- 서늘한여름밤, '어차피 내 마음입니다' 中
저녁 6시 이후로 회사 일을 생각하며 살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잘 견뎌야겠다.
3.
건강이 좋지 않다. 지난 설 즈음 산부인과에 다녀왔다. 난생처음 아파보는 곳이 미친 듯이 아팠는데, 배도 아닌 게 어쩐지 소화기관 같지 않았다. 몸의 이 부분엔 무엇이 있나 생각하니 자궁이 있더라. 어쩌겠어. 살면서 갈 일이 없었던 산부인과에 갔다. 난소에 물혹이 있댔다. 그게 좀 눌려서 아팠나 보네요.
혹이 혹시 커지거나 줄어들진 않는지, 계속 거기 있다면 악성은 아닌지 이런저런 검사를 했다. 난소암까지 검색해보며 덜덜 떨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냥 무해한 혹이었다. 의사에게 이제 어떡하냐 물었더니 그렇구나 하고 지켜봐야 하는 일이라고 (무심하게) 말했다. 전문가가 그렇다면 그렇거니 하고 말았는데 그 이후로 한 번의 생리를 더 하고는 이제까지 생리가 없다. 이렇게 오래 하지 않은 건 생리를 시작한 이래로 처음이다. 안 하면 편할 줄 알았는데 걱정이 더하다. 오매불망 기다리게 될 줄이야.
어제 오전에 참지 못하고 병원에 갔다. 소용 없는 일이었다. 초음파를 한 지 너무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별로 검사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나. 들여다보고 생리를 할 것 같으면 하겠네요 하고 기다리자 하겠고 안 할 것 같으면 안 하겠네요 좀 기다려봅시다 라고 말할 테니 그냥 보지 말자는 의사의 말에 나도 별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러게요. 그럼 이만 바이 바이. 또 기다리는 수밖에 없네.
그런데 이틀 전 밤부터 자다가 배가 아파서 깨고 있다. 낮에 속이 좀 불편해도 그러려니 했지만 밤에 깨는 건 -늘 쿨쿨 잘도 자는 나에게- 이례적인 일이다. 어제는 하루밖에 되지 않은 일이라 굳이 의사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이틀 연속으로 깨고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어쩐지 낮에도 더 안좋은 것도 같고. 모르겠다. 신경성인가? 이러다가 생리가 시작되면 얼마나 고마우려나 생각만 한다. 몇 주 더 기다리는 방법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정도면 일상은 깨지고 자존감은 흔들리고 몸은 수상하다는 근황이 잘 정리되었겠지. 건강하게 살고 싶다. 긴 삶의 물결을 너무 흘려보내지는 말아야겠다며 다짐을 한다. 그래서 이 글이 시작되었다. 봄은 왔고 시간은 흐르고 선거도 지나가는 평범한 하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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