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품목을 수집하거나 맛집을 찾아다니는데 큰 흥미가 없다. 취미는 아이쇼핑이던 시절도 지났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순간부터 월급의 많은 부분을 자연스럽게 저축했고, 몇 년이 흐르니 이러구러 돈이 좀 모였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많지도, 또 누군가에게는 아주 적지도 않을 금액이지만 내게는 그저 딱 최선인 금액이다. 이쯤 되면 애썼다 싶을 만큼의 돈.
내가 피땀흘려 번 돈이라며 한 푼 만 나가도 뼈저리게 아까웠던 적도 있었다(피는커녕 대체로 땀도 흘리지 않았지만). 그저 저렴한 상품을 많이 쌓아두면 기분이 그득하고, 가성비를 따지며 호사스러운 여행에 혀를 차기도 했다. 투자도 그랬다. 경제라고는 아는 것도 없었거니와 원금이 조금이라도 깎이는 걸 견딜 수 없었다. 어찌 되었건 원금을 많이 모으는 것만이 상책이었다.
이제는 분기점을 지나 여유가 생겼기 때문일까. 과하게 작은 돈에 연연하지 않는다. 좋은 물건 하나를 사는 일은 아까워 하지 않는다. 주변 사람을 챙기는 데 쓰이는 돈에 기꺼운 마음을 가진다. 타인의 취향을 인정(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돈을 잘 모으고 잘 쓰는 법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꾸준히 경제 공부를 한 것은 물론이고.
원금을 보장해주는 상품에만 집착하는 시기도 지났다. 파이차트를 그려 얼마만큼을 얼마나 위험한 자산에 투자할지 고민한다. 원금보장 상품이 90%, 미미한 리스크 상품이 10%인 수준을 지나 점점 리스크 상품의 비중이 높아지고 리스크의 정도가 올라간다. 내가 얼마나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게 중요했는데, 리스크를 감내할 담과 경험이 모래성만큼 쌓인 덕이다.
종종 돈에 매달리는 여자친구가 된 느낌이다. 돈이 사람이라면 이렇게 인정머리 없고 야속한 이와는 만나지 않으리. 하지만 돈 덕분에 기분 좋은 순간도 너무 많아서 이건 마치 나쁜 남자를 끊을 수 없는 비련의 여주인공과 같다. 지금 내 몸에선 내 기준에 저렴하진 않은 값을 주고 산 러쉬 바디밤의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 바디밤의 향기가 날 행복하게 하고, 바디밤의 닳는 속도가 내 애간장을 닳게 한다. 돈이 많으면 바디밤쯤 수십 개를 쌓아놓고 쓰련만.
공간을 사랑하는 나는 자가를 마련하는 꿈을 꾼다. 집이 생기면 지금처럼 열심히 돈을 불려야 할 이유가 사라질텐데 그때에도 과연 나는 돈을 사랑할까? 언젠가 다가올 '돈 해방의 날' 이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끔 생각한다. 아직 너무 먼 일이기는 한데, 미리 생각해 두지 않으면 길을 잃고 집착의 방향으로 걸어갈 것만 같다. 이럴 땐 먼저 걷는 사람의 경로를 흘낏 넘겨다본다. 마침 멋지다고 생각하는 장항준, 송은이의 인터뷰를 발견했다.
장항준 우리 둘 다 돈 욕심이 크게 없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진보냐 보수냐가 아니라 자본에 얼마나 집착하느냐가 절대적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 같다. 근데 어느 정도 비슷한 스탠스를 갖고 있으니까 우리는 같은 이데올로기를 가진 셈이다.
송은이 오빠도 잘돼서 돈을 더 많이 받으면 스탭들하고 나누잖아.
장항준 그런 걸 내 입으로 얘기할 때 너무 수치스러워~.
송은이 그래서 이번엔 내가 했어. (웃음)
- 씨네21 인터뷰 中 (클릭)
나도 장항준, 송은이와 같은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금방 쫒아 가볼게요. 저도 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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