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고과의 계절이 돌아왔다. 예상했던 등급을 받았다. 조직에서 나의 입지는 이것이구나 하며 순응하였다. 이렇게 몇십 년쯤 살다 보면 바보라 불려서 바보가 되었는지 바보여서 바보라 불리게 되었는지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 될 테다.
내가 무엇이 부족했는지 생각했다. 시키는 일은 전부 열심히 했는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지난날의 나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마음으로 부당함을 되뇌다가 마음을 터 놓는 동기와 몇 마디 잡담을 했다. 다른 조직에 있는 그에게 상황을 설명하니 덜컥 깨달음이 왔다. 내가 시킨 만큼 했을 때 누군가는 시킨 수준보다 더 했음을 내 입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이 게임은 상대평가라는 걸 왜 자꾸 잊을까. 나는 상대적 부족을 뛰어넘고자 했나? 전혀 아니었다. 나란 사람은 이 조직 안이 아닌 바깥에 있다 믿었다. 전심을 다하지 않았다. 살면서 절대평가로 나를 채점할 기회는 이제 거의 없을 테니, 남보다 적당히하면 적당에 합당한 성적을 받는다. 이래서 어른들이 공부가 제일 쉽다고 했나.
내가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철마다 번민하는 이유는 돈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조직이 등급별로 주는 돈은 꽤나 차이가 난다. 나는 돈에 집착한다(바로 지난주 글에서 돈에 의연해지고 싶다고 썼는데. 우습지도 않다). 평가는 알아서들 해. 돈은 똑같이 주란 말이야. 돈에서 자유로우려면 젊은 날 많이 벌어야 한다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가. 월급 외의 파이프라인을 만들라지만 이 조직은 겸직이 금지되어 있다. 창작활동은 기관장 허가 하에 가능하다고? 뭔가를 창작한다는 기침 소리라도 내었다간 내용이 탈탈 털리고 사는 게 여유 있다며 비웃음을 살 것이다.
금요일의 우울에 찌질대다가 퇴근 후 운동을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루 중 한 가지쯤은 스스로 자부심 느낄 일을 하고 싶었고, 운동만큼 내뜻대로 결과를 낼 수 있는 일이 없다 싶었다. 세상 모든 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면 나 하나 정도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지. 모델 한혜진이 운동을 하는 이유가 문득 생각났다. 나도 한번 멋있는 사람 따라 해 보자 이거야.
헬스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올해의 나는 아직도 수련이 덜 되어 작은 알파벳 하나에 연연했지만 미래의 나는 정말로 나의 가치를 내 안에서 잘 찾고 있기를, 그리하여 흔들림은 지나가는 산들바람쯤으로 여길 수 있기를 바랐다. 이렇게 살다 돌아보면 나도 모르는 새에 더 단단해져 있겠지. 사는 게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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