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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2022.1.18. 그래서 이름은 뭐라고 짓지

by 푸휴푸퓨 2022.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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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둘레길을 또 한 코스 걸었다. 엄마의 패딩과 신발과 양말을 빌렸고 엄마의 조언대로 따뜻한 물을 싸갔다. 서른이 넘었지만 부모님 없이는 못 산다. 우리 집 육아는 언제까지 계속되려나 싶은데 여전히 곤란하면 엄마를 부른다. 얼마 전에는 엄마가 가족 카톡방에 '아가들 대답하세요'라고 올려 화들짝 놀랐다. 아가 치고 제가 좀 크네요.

  지난 번보다 체력이 늘었다고 체감했다. 남자친구에게 징징대지 않을 수 있어 새삼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나의 남는 체력을 본 너는 체력을 털어야 한다고 손을 끌고 언덕을 달렸다. 끌고 간 사람도 끌려 간 사람도 숨이 턱끝까지 찼다. 벤치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는데 남이야 어찌 보건 우리는 재미가 있었다. 의미 없는 장난만큼 꿀잼인 것도 없지.

  꿀잼만큼 꿀맛도 좋아서 달달한 막걸리를 먹었다. 뒷맛이 깔끔하고 숙취가 없어서 좋아하는 집이다. 대낮부터 전에 막걸리를 마시니 저녁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9시도 되지 않아 집에 들어와서는 따뜻한 물에 씻고 꿀잠을 잤다. 집에 간 너도 정신없이 일찍부터 잤다고 했다. 다음에는 훨씬 긴 둘레길을 걸어야 해서 걱정이 태산이지만, 일단 이번엔 꿀 같은 하루였다.

 

2.

  인생 첫 차를 계약했다. 아직 인생에 처음인 경험이 있는 나이라 이거예요. 아빠가 내 명의로 차를 사겠다고 선언한지 어언 한 달. 언니가 팸플릿을 가져오고 형부가 내용을 설명해줬다. 마음에 드는 옵션을 고르다 보니 풀옵션의 무시무시한 차를 사게 됐다. 운알못은 최신 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계약서를 쓰러갔는데 아는 게 없으니 물어볼 게 없어 눈을 도록도록 굴렸다. 영업사원은 질문 있으면 하시라고 몇 번을 말해주다 '첫 차를 사시면-'으로 시작하는 설명을 해줬다. 차를 끄는 언니가 여러모로 챙겨가며 질문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영업사원의 계약 목록을 흘낏 보니 내가 그날의 두 번째 계약자였고 그 전날에도 계약 건이 최소한 한 건이 있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이로고.

  자동차에 별 감흥이 없었는데 여기저기 차가 생긴다는 말을 하니 온통 부럽다는 답이 들렸다. 이렇게 모두가 하나같이 부러워한다면 정말 좋은 일인가 싶어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차알못인 내가 얼레벌레 차주가 되고 있군. 운전 연습은 여름의 내게 미루기로 했다. 차 이름은 뭘로 하지.

부릉부릉 타타타타

3.

  계약을 하러 간 김에 고속터미널 지하상가에 니트를 사러 갔다. 우연찮게 발견한 뒤로 몇 년째 간다. 두껍거나 얇거나 오로지 니트만을 파는 곳으로 단순한 디자인이라 패피는 못되지만 두어철 입을 기본템으로 좋다. 가격도 저렴해서 니트가 생각나면 찾아가는데 딱 하나 단점이 바로 주인 할아버지다. 욕심 많고 말 많은 할아버지는 시간만큼 늙어가며 같은 자리에 있다.

  코디 센스도 여성복에 대한 관심도 없어 뵈는 할아버지는 아무 옷이건 사려는 사람이 마음에 들어 하는 쪽으로 무조건 좋다며 추천한다. 왼쪽 옷이 사실은 원단이 비싼 옷이라고 말했다가 오른쪽 옷이 촉감이 부드럽다고도 한다. 조언은 포기하고 혼자 고민하고 있노라면 매번 몇십 년간 니트 장사를 했는데 마침 오늘(혹은 엊그제) 가격을 몇천 원 내려서 이 가격에 다시는 살 수 없을 거라고 주장한다. 물건을 고르면 그걸로 정말 되냐고 더 안 사냐고 권한다. 하나보다는 두 개를, 두 개보다는 세 개를 파는 게 좋겠다는 건 알겠는데 너무 노골적으로 들이대니 머쓱하기 짝이 없다.

  할아버지는 니트 장사로 돈을 많이 벌었을 것 같다. 못해도 빌딩 하나쯤은 있는데 악착같이 가게로 나오는 장사꾼일 것만 같다. 돈을 벌 줄은 알아도 쓸 줄은 모를 이 어르신은 평생 자리를 쾌적하게 만드는 법 따위에 관심을 쏟아 본 적이 없겠지. 어제도 할아버지는 얼기설기 쌓인 니트 옆 불편한 의자에 앉아 있었고, 니트를 고르는 언니와 나를 구부정하게 -그러나 바삐- 따라다녔다. 니트는 좋은데 말씀은 듣고 싶지 않다고 하면 깜짝 놀라시려나. 굳이 내가 오래 살아남길 바라지 않아도 알아서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가게는 많지 않다. 어쨌거나 어제 산 니트는 가격 대비 품질이 좋고, 나는 그곳에 다음 계절에 또 찾아갈 의향이 있다. 처음 입은 니트가 기분 좋게 부들거린다.

니트만큼 마음에 드는 검스 맛집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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