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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2022.9.13.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도 사람이 좋아요

by 푸휴푸퓨 2022.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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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석이지만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 가족보다 (남자) 친구를 만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썼다. 특별한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즐거웠고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서울이 텅 비었을 줄 알았는데 사람이 많아서 놀랐다. 

  연휴의 마지막 밤을 '고독사 워크숍(박지영, 민음사)'을 읽으며 보냈다. 무심코 집었는데 친척을 전혀 만나지 않은 명절에 읽기가 아주 좋은 책은 아님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책이 '고독사' 보다는 '고독'에 초점을 맞춘 터라 더욱 그랬다. 각자 자신만의 고독을 단련하는 삶. 나의 찝찝함과는 관계없이 위트의 정도나 이야기의 무게가 적절한 책이었다. 무엇에 적절하냐고 묻는다면 그냥 내 마음에 적절한 것일진대 결국 책이 마음에 들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2.

  일요일에 친구들을 만났다. 17살 때 처음 만나 나이의 앞자리가 두 번 바뀌도록 여전히 친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우리의 주제가 어째서 결혼과 삶 등으로 바뀌었는지 세월의 흐름에 놀라워했다. 친구 한 명의 동생이 11월이면 결혼을 한다. 갓 스무살이 되었던 그 친구를 본 기억이 생생한데 말이야.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친구들에게 줄 작은 선물을 샀다. 먼저 만난 한 친구가 무슨 일 있느냐며, 어디로 떠나냐고 물었다.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 익숙하다나. 다음 친구는 당황하지 말라고 증정 전 미리 안내를 했다. 헤어지면 집으로 갈 거고,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용.

  갑작스레 선물을 할 마음이 들었던 건 엄마의 고등학교 친구분들 덕분이었다. 토요일에 추석 맞이 인사를 한 엄마의 단톡방을 보았다. 한 분의 가족사진이 눈에 띄었다. 큰돈은 없어도 아늑한 집에 살가운 두 딸이 있는 아줌마는 마음이 넓고 웃음이 많다. 추석이니 두 사위까지 방문해서 여섯이 단체 사진을 찍으셨더라. 아주머니 부부 양쪽에 딸 부부가 앉아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당연히 친구들은 하나같이 좋아 보인다는 말을 보냈다.

  그런데 중간에 맥락에 맞지 않는 전 사진이 여럿 있었다. 부치느라 허리가 아프다는 말도 붙었다. 건물에 오피스텔에 아파트까지 없는 게 없는 이 아주머니는 젊은 시절 장사를 해서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물건값은 반드시 깎아야 하고 뷔페에서는 티백을 챙겨야 하는 데다 화가 치밀면 남편에게 욕을 한다. 몸은 여기저기 아프고 아들은 월급을 부인과 나누기 싫다며 비혼 선언까지 해서 즐거울 일이 없다. 돈 문제로 머리가 아파 구완와사가 온 적도 있었다. 전을 부친 모양은 감탄이 나올 만큼 멋졌지만 이게 무슨 맥락인가 싶었다. 환갑이 넘은 어른들은 그러려니 하며 친구를 달래주었다.

  돈을 모으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나지만 불행한 부자는 싫다. 친구의 화목한 사진을 보아도 칭찬은 못하고 전을 굽느라 허리가 아프다는 푸념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삼프로TV의 김동환 소장이 '부자가 되는 것은 선택'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물론 그가 말한 부자가 반드시 주변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이란 뜻은 아니다). 처음 돈을 모으기 시작하면서는 반드시 훌륭한 부자가 되고 싶었지만 점차 내 그릇의 크기를 가늠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나는 인색한 부자가 되거나 주변을 돌보는 안부자 정도만이 될 깜냥이다. 그렇다면 전자보다는 후자를 골라야지. 그게 더 행복하니까.

  안 주고 안 받기를 외치기보다 아끼는 사람에게 좋아하는 선물을 웃으며 건넬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우리는 또 몇 달 이따가 만나게 되겠지. 몇 시간의 이야기를 채울 수 있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다 오자. 아쉬워하며 헤어졌지만 또 만날 것을 알아 걸음이 가뿐했던 작별이었다.

 

3.

  공공기관에 다니는 사람의 에세이를 읽을 기회는 많지 않다. 겸직을 신청하고 글을 쓸 만큼 적극적으로 셀프 브랜딩을 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겠지. 큐레이터의 에세이를 읽다가 공공기관 비스름한 것에 다니는 내게 도움이 되는 구절을 발견했다. 조직에서 달리는 습관을 버리고 감정조차 느릿느릿 미적거리는 내게 왜 달려야 하는지 알려주는 구절이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해?"
걷는 대신 뛰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일단 나른한 상태에 머물게 되면, 그 아늑함이 어찌나 좋은지 알기에 꺾인 의지가 돌아오지 않을까봐, 나 자신을 제어하지 못할까봐, 우선 뛰고 보는 A씨.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남의 인생을 살까 두려워 시간을 쪼개어 탐색 중인 B씨. 어느 날은 A이자 또 언제든 진심을 다하는 B이기도 한 우리는 결론을 내리기로 한다. 가장 큰 고민거리라고 여기는 건 스르륵 지나가 묻혀버리고 남는 것은 조개껍데기와 고래 뼈, 우리를 키운 것의 흔적일 뿐이라고.
- 멈춰서서 가만히, 정명희

 

  정이 가지 않는 누군가라도 사무실에서 홀로 눈물을 떨어뜨리는 장면을 보면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고인물이라 안타까움보다는 헛웃음이 먼저 일었다. 눈물까지 흘릴 만큼 회사에서 감정을 쓰다니. 타인의 눈물에 이렇게 매정하게 반응하는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있는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가. 당신의 눈물에 공감할 순 없지만 나는 주어진 길을 나대로 달려가기는 할 것이에요. 각자의 길을 잘 갑시다. 여간하면 겹치지는 않기를 바라요.

 

4.

  내가 매일 바라보며 흐뭇해하는 포스터를 그린 작가 장자크 상페가 8월에 돌아가셨단다. 쓰무라 기쿠코의 '이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를 검색했는데 상페의 첫 책이 '쉬운 일은 아무 것도 없다'여서 함께 검색 결과에 딸려 나왔다. 우연찮게 접하는 소식에 마음이 쓰인다. 상페의 사람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늘 좋았다. 편안히 쉬시기를. 안녕.

The New Yorker (August 21, 1989)

 

* 열린책들에서 전한 그의 부고

 

장자크 상페가 8월 11일 목요일, 8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BY 열린책들] 장자크 상페가 8월 11일 목요일, 89세의 나이로 여름 별장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항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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