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600일이 다가왔다. 선물을 주고받으려던 건 아닌데 마침 서로 갖고 싶은 물건이 있어 주고받았다. 실용적인 너에게는 보조배터리를 사주었다. 나는? 당당하게 브레드 이발소 인형을 받았지. 인형도 좋지만 쓸모가 없으면 아무 물건도 사지 않는 네가 내 선택에는 반색하며 기꺼이 응답해주는 게 더 좋다.
빵 친구가 집으로 오기 전 오래전에 받았던 펭귄에 새 솜을 넣어 빵실빵실하게 부풀려 주었다. 배송된 새 인형을 보고 한껏 신난 내게 엄마와 언니는 빵 친구의 귀여운 점을 모르겠다며, 아마 남자친구도 모르면서 사주었을 것이라 짐작하였다. 그렇게나 귀염성이 없나! 네가 전혀 티를 내지 않아서 몰랐는데. 오랫동안 진지한 이야기도 실없는 이야기도 잘 나눌 수 있는 네가 좋다. 여전히 아주 많이.
2.
이제 다시 둘레길을 걷기 시작할 때가 되었지. 재개를 축하하는 기념으로 비교적 쉬운 서울둘레길 3-1코스를 걸었다. 고덕역에서 광나루역까지는 대체로 평지인 데다 날도 맑아 기분이 좋았다. 암사동을 지나는데 초등학교 조형물로 무려 빗살무늬 토기가 있었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동상보다 훨씬 훌륭했다.
마라톤이 진행되는 길을 지나서 선수 여럿을 구경했다. 종착지에서도 힘이 남은 주자와 끝이 한참 멀었는데도 이미 기진맥진한 주자 모두를 볼 수 있었다. 힘이 남은 분은 그 단련의 과정이 대단해서 멋지고, 힘이 모자란 분은 그럼에도 나아가고 있어 멋졌다. 공염불만 몇 년 째지만 너무 많이 늦기 전에 나도 마라톤에 참가해보고 싶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건 몸이다. 몸에 대한 의지가 다른 무엇에 대한 의지보다도 한참 부족하다.
둘레길 끝자락에 외관이 힙한 베이글집을 발견해서 들어갔는데 맛이 끝내줬다. 선선한 야외에서 베이글에 아아를 마시려니 이게 바로 일상이 여행이구나! 직원분이 무뚝뚝한 -그러나 베이글을 또 사 먹기 위해 궁금한 게 많은- 아저씨에게 붙임성 있고 자부심 있게 응대하신다 싶었는데 주인이셨다. 옆에 베이글집만큼이나 힙한 버거집도 같이 운영한다고. 밝은 기운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베이글을 포함한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가게였다(참고로 베이글집은 광나루역 근처의 크림베이글!).
3.
아빠가 담낭 제거 수술을 하셨다. 수술 시간도 짧고 간단하니 걱정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속은 달랐다. 전신마취는 매번 걱정이다. 다행히 나흘 만에 별일 없이 돌아오셔서 집에 계신 모습을 보니 기뻤다. 이제 회복하고 여유롭게 여행만 다니시면 되려나. 은퇴 첫 해, 아빠의 다사다난한 몇 달이 지났다. 축하의 박수 짝짝짝.
4.
이연 작가의 책을 읽었다. 가끔 그의 영상을 본다. 몇 년 전에는 동년배가 유의미한 창작물을 낸다고 감탄했는데 이제는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감동하는 일이 잦다. 멋진 사람이 참으로 많아. 나이가 많으면 많아서, 같으면 같아서, 적으면 적어서 감탄하게 된다. 나이로 사람을 판단하는 뇌의 경로를 지워버려야 해.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고통이 있다. 같은 고통을 공유할 순 없지만 서로가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함께 공감할 수 있다. 너도 나도 고통이 늪이 아니라 탄탄한 기반이 되기를. 고통을 멋지게 뛰어넘은 이연 작가가 더 멀리 도약했으면 좋겠다. 내가 박수 칠 수 있게.
울 것 같았다.
나는 너무나 작은 것을 지키려고 삶을 낭비하는군.
근데 그게 아깝지 않단 말이야.
내 꿈은 이제 변하지 않을 것이다.
평생 수영을 하는 할머니가 되는 것.
아주 멀리 헤엄치는 것.
- 이연 '매일을 헤엄치는 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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