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둘레길을 돌면서 처음으로 작은 두 코스를 한 번에 걸었다. 2-1과 2-2를 한 번에 통과했는데, 가운데 도장이 산 중간에 있어 두 번에 나누어서 걷는 게 더 험난한 곳이었다. 하루 만에 도장을 세 개나 찍으려니 기분이 삼삼했다.
아차산은 처음 올라봤는데 산 위에서 보는 풍광이 아주 좋았다. 왼쪽은 광진구, 오른쪽은 구리시라는 표지판이 군데군데 있는 것도 재미있고 산을 내려오니 광진구가 아니라 중랑구라는 점도 재미있었다. 산을 생각하며 이런 말 잘 안 하긴 하는데, 아차산은 날씨 좋을 때 또 한 번 올라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늘 산을 함께 오르는 남자친구는 나보다 폐활량이 좋고 군대에서 산을 많이 타서 등산 노하우가 많다. 오르막이고 내리막이고 나는 늘 남자친구를 허덕이며 따라간다. 남자친구가 최근 살이 조금 쪄서 이번에야말로 내가 잘 갈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나는 헬스장 천국의 계단 기준 5 정도의 속도로 천천히 오르고 싶은데 남자친구는 8의 속도로 훠짜훠짜 나아갔다. 먼저 가라거나 천천히 가 달라는 말도 통하지 않는 스파르타 선생님인데, 그 와중에 나의 한계를 어찌나 잘 포착하시는지 도저히 못 참겠을 때는 또 기다려 주었다. 이성적인 선생님에게 쉬었다 가자는 합리적인 사유를 댈 것이 없어 나는 "나 못가! 나 안가!"를 수시로 외쳤다(나 쉴 거야! 혹은 나 앉을 거야! 와 같은 자매품도 있다). 언제쯤 내가 먼저 뛰어갈 수 있을까. 너무 싫지만 천국의 계단을 더 연습해야겠다고 느낀 날. 씁씁후 씁씁후!
2.
비비안 마이어의 '나는 카메라다'를 읽었다. 경매로 나온 창고에서 발견된 수많은 사진. 생전에 빛을 보지 못했던 작가. 사진만큼이나 힙한 이야기를 지닌 작가라 호기심이 마구 동했다. 사진집을 편히 볼 수 있을 때면 도서관과 가까이 있음이 더욱 고마워진다. 나는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구나.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내 취향은 아니었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을 볼 때와는 다르게 뭔가 정이 가지 않았다. 나는 사진에서 발견되는 사진작가의 따스한 시선을 좋아하는데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에서 따뜻함이나 안온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촬영당한 사람들의 표정이 대부분 '이 여자는 뭐야?' 류의 표정을 짓고 있어서 그런가. 그녀가 관찰자의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선입견으로 작용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런가 하면 비비안 마이어가 사진을 공개하는 걸 좋아할지에 대한 궁금증도 여전히 남아있다.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는 대중의 규모와 현상은 마이어가 예상하지도 못했던 바다. 페이스북에 올린 예고편 동영상에 달린 수많은 댓글 중에 이런 글이 있다. "그의 은밀한 열정이 세상에 떠밀려 나오다니, 슬프다." 이는 피할 수 없는, 그리고 계속해서 남는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공개된다고 해서 비비안 마이어와 그의 작품이 달라지는가?'
-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 中, 마빈 하이퍼만의 글
공개된다고 그의 작품이 달라지는 건 모르겠는데, 마이어가 공개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공개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불태워달라는 유작이 공개된 예술가는 마이어 말고도 많지만(마이어는 창고 임대료를 못 냈을 뿐 태워달라고 한 적도 없다). 꽤나 가까운 시대의 인물이라 작품보다는 인물의 마음이 궁금한지도 모르겠다. 미지의 인물을 살짝 엿보는 시간이었다. 그 알쏭달쏭함이 마이어의 특징이겠지.
3.
유튜브를 개설했다. 혼자 하는 건 아니고 언니와 함께다. 언니와 격주로 한 번씩 올리기로 했고 내 영상을 먼저 올렸다. VLLO로 편집하니 핸드폰만으로도 수월하게 영상을 만들 수 있었다. 유료 기능을 결제하고 싶기는 한데 아직 섣부르다 싶어 욕구를 억누른다. 세상에는 재미있는 게 참 많아. 영상으로 찍을라 치면 평범한 순간도 즐거워진다.
어디선가 브이로그의 장점으로 '젊은 시절의 나를 기록할 수 있다'가 꼽힌 걸 봤다. 영상을 딱 한 편 만들었을 뿐이지만 크게 공감한다. 기억에서 옅어졌을지도 모를 친구들과의 여행이 오래도록 즐겁게 남을 테니까. 업무로 영상 편집을 할 때 새로운 기술을 배워두면 어떻게든 좋으리라 믿었다. 지금 내 영상을 편집하며 흥겨우려니 고군분투하던 예전이 감사하다. 부정적인 감정은 흘러가게 두고 행복한 일은 오래 붙잡고 싶다. 사용하는 SNS가 하나 더 늘었네.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4.
아오야마 미치코의 책 세 권을 2주 정도만에 연달아 읽었다. 힐링의 일본 소설을 읽다 보면 인생 뭐 있나, 이렇게만 살면 된다 싶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인생 내내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경제 성장기와 거품 경제 시대 사람의 생각이라는 지나가는 문장에서 문득 깨달음을 느끼기도 한다. 아무려나 좋다는 이야기다.
'가마쿠라 소용돌이 안내소'에서 나이듦의 좋은 점을 꼽은 문장이 마음에 들어왔다. 이런 말을 보면 한 살 두 살 먹어갈 미래가 기대된단 말이지. 돌아볼 추억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
"좋다. 옛날 생각이 난다는 건 나이 든 사람에게 주는 포상같은 감정이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맛이 더 깊어져."
"그냥 나는 흘러서 도착한 곳에서 그때그때의 최선이 일으켜 줄 기적을 믿었어. 예상치 못한 전개로 다음 문이 열리는 게 재미있거든. 그건 회사원이든 프리랜서든 마찬가지야. 그때그때의 최선의 결과,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 거지."
아오야마 미치코, '가마쿠라 소용돌이 안내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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