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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2022.10.12. 나는 내 앞만 보고 가

by 푸휴푸퓨 2022.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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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번 주도 어김없이 둘레길을 다녀왔다. 한 주만에 쌀쌀함을 느끼는 날씨가 됐다. 어렸을 땐 가을이 세 달이라 배웠는데 이제는 3주도 채 가을이라 부르기 어렵다. 앞으로 서울둘레길을 일곱 번은 더 가야 하는데, 추우면 감기에 드는 게 걱정이다.

날씨는 엄청 좋았다

  봉산과 앵봉산을 오르는 7-2코스는 오르락내리락이 심해서 심적으로 힘겨운 코스였다. 아차산보다 몇십 미터가 낮은 산인데도 반복되는 계단 덕에 훨씬 고생스럽게 느껴졌다. 이건 성격과도 관련이 있는 듯한데, 엄마와 남자친구는 그렇게 힘들지 않다고 생각한 반면 아빠와 나는 아차산이 낫다고 주장한다. 쉬기를 반복하며 짧은 구간을 올라가는 게 편한 사람과 한 번에 오르고 치워버리고 싶은 사람의 차이일까.

  남자친구가 유일하게 즐겨하는 게임이 새 시즌을 시작하는 날이어서 집중할 수 있게 말을 걸지 않았다. 혼자 공상에 빠지려니 나는 한 번에 오르는 높은 언덕이 좋은지 짧게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고개고개가 좋은지 생각하게 됐다. 산이라면 전자가, 인생이라면 후자가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지. 올라갈 때 힘들더라도 안심하고 내려올 수만 있는 구간으로 끝나는 산이 나는 좋게 기억이 남는다. 하지만 인생의 후반부가 내리막만 있는 건 슬퍼. 대단한 도전을 하며 살 생각도 없으니 작게 오르고 또 작게 위기가 와도 다시 주먹 쥐고 오르는 그런 삶이 좋다. 80대가 되어서도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면 좀 두렵긴 한데, 그때는 또 내가 이팔청춘 못지않다고 느낄 수도 있잖아. 오르막만 있는 산도 삶도 별 재미가 없고 내리막만 있는 곳은 무릎이 아파서 싫다. 뭐든 적당히 섞인 게 맛이다. 인생이 달고 써야 더 깊지 않겠나.

 

2.

  침착맨과 주펄의 방송에 이동진 평론가가 나와서 무려 3시간을 떠들고 갔다. 그러니 어쩌겠어, 3시간을 봐야지. 무편집본을 보는데 시간이 줄어드는 게 아쉬워서 아껴가며 봤다. 영화를 좋아하는 주펄과 영알못인 침착맨의 배려있는 질문, 늘 답변이 준비된 달변가 이동진의 조화가 아름다웠다. 중간중간 아재들 유머 코드는 또 왜 저랑 잘 맞는데요? 질문도 많이 생각해서 짰겠다고 느꼈는데 심지어 적재적소로 순서를 바꿔가며 묻는 센스까지 좋았다.

 

  언제부터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남자친구를 만나고, 남자친구가 영화를 설명해 주면서부터다. 영화도 좋고 영화 후 나누는 이야기도 좋다.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을 짚어주면 신기하고 새 영화 소식을 누구보다 빠르게 알려주면 반갑다. 영화 감식안도 믿어서 최근엔 혼자였다면 절대 보지 않았을 '프레이(Prey)'도 억지로 보았는데, 아주 재미있었다. 영상이 책만큼 즐거워지게 해 준 남자친구에게 박수! (그러나 내 올해의 영화 '헤어질 결심'을 나만큼 좋아해 주지 않는 부분은 슬프다)

 

3.

  책 몇 권을 보았는데 나쁘진 않았지만 기억에 사무치게 남는 내용은 없었다.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몇 편을 정리한 '일터의 문장들'을 읽었고, 하현의 에세이 '아이스크림: 좋았던 것들이 하나씩 시시해져도'를 읽었다. 아무튼 시리즈같이 짧은 시리즈류의 책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는데 아이스크림을 읽고 나의 부족함을 느꼈다. 나는 덕심이 부족한 부적격자다! 살면서 아이스크림 꽤나 먹었지만 저자가 말하는 아이스크림 이야기를 많이 알아듣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이가 시려 차가운게 힘든 나는 그저 안타까울 뿐.

정말 좋아하는 류의 책만 읽었구만

 

  '오늘도 공방으로 출근합니다'는 그냥저냥한 공방 소개 책이겠거니 했는데 내용이 알차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공방을 열고 싶은 사람처럼 설레서 집중하며 책을 읽었다. 가게 운영이 쉽진 않겠지만 보람은 넘칠 것 같은데. 저자의 공방 '이본느모건'도 인스타그램에서 찾아봤는데 이제 자수를 전문으로 하고 캔들은 별로 안 하시는 듯했다. 캔들 수업이 있으면 갈 생각이 있었는데 좀 아쉬웠다. 멋지게 열심히 사는 사람 만세!

 

4.

  엄마와 아빠는 은퇴 생활 적응 기간을 삐걱삐걱 지나고 있다. 아빠의 요양은 거의 끝물이고 이제 생활만 남았다. 그래서일까, 엄마는 참아왔던 마음을 드러내었다. 며칠간 아무 의욕도 보이지 않고 웃지도 않았다. 몸도 아프다고 했다.

  아빠는 유난히 엄마에게만 함부로 대하는 면이 있다. 별 것도 아닌 일에 버럭 소리를 지른다. 나나 언니라면 그러지 말라고 바로 한 소리 하련만 엄마는 참아준다. 그리고 상처받는다.

  엄마가 작정하고 (혹은 작정이 아니라 진심으로 기분이 좋지 않아서) 저기압이면 아빠는 엄마의 눈치를 본다. 화를 내면 눈치를 볼게 아니라 애초에 배려하고 잘 지내면 좋지 않나. 종종 아빠에게 답답하고 가끔 아빠가 안쓰럽다. 편안히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경상도 남자.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해서 어떻게든 가족을 다 짊어지고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 무얼 하든 뼛골의 진까지 빼서 하는 방법 말고는 몰라서 멈출 수가 없는 아빠. 그 옆에서 치이는 엄마.

  두 분이 타협점을 찾고 편안해지시면 좋겠다. 누구보다 서로를 제일 아끼는 친구인 건 본인들이 더 잘 아시니까. 그리고 두 분 모두 건강했으면.

 

5.

  회사에서는 전기방석을, 집에서는 전기장판을 틀었다. 날씨가 추워서 호달달 떤다. 가습기도 꺼내야지. 건조함은 눈알이 가장 먼저 알아서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눈물을 넣어줘도 그때뿐이다.

 

얼마나.. 포근할까...

  작년부터 고가의 캐시미어 목도리가 갖고 싶다. 한 개 사는 게 별 일도 아닌데 이렇게나 고민이 된다. 가격보다는 물건을 상전처럼 이고 지고 살까봐 걱정이다. 나는 물건을 아무렇게나 잘 두는 편인데 그렇게 두었다가 잃어버리면 세상을 원망할까봐.

  이렇게 고민하는 걸 보면 분수에 맞지 않는 물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욕심이 난지 벌써 2년째다. 몰랐는데 작년 11월에 가격을 20%나 인상했더라. 작년 10월에 살 걸 그랬다고 괜히 후회해본다. 한 번 사면 평생 쓸 텐데 싶다가도 그 평생을 올해 시작할 필요는 없어 보이기도 하고 그렇다.

  나는 어쩌다가 머플러에 꽂혀버렸나. 욕망은 끊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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