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언니의 결혼식 축사로 행복을 말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행복. 그 무엇보다 자신들의 행복을 우선하고 살고, 힘겨울 때는 뒤에 부모가 있겠다고도 했다. 언니와 나는 이미 부지런히 행복을 위해 살고 있었으므로 그저 웃었다. 어쩌면 아빠는 스스로의 행복만을 위해 살지 못했다는 고백일지도 몰랐다. 알고 있었지만.
아빠는 연초에 사무실에서 물러났다. 둘레길을 좀 걷는가 싶더니 허리 수술을 했다. 회복을 하는가 싶더니 담낭염이 심하게 생겨 담낭을 떼어냈다. 몸 관리로 몇 개월이 지나는 동안 아빠가 지치는 만큼 엄마도 지쳤다. 엄마가 수발들기를 힘들어한다는 게 눈에 보였다. 아빠는 그게 마뜩잖았고, 자주 짜증을 냈다. 그 와중에 몸이 좀 회복되었으니 술을 마시겠다고 했다. 아빠의 회복에 기운을 쏟던 엄마는 맥을 놓았다. 엄마는 몸이 아픈 여러 날을 지내고 아빠에게 애정을 떼어내겠다고 주장했다(그 말은 오히려 애정 표현으로 보였다). 아빠는 아빠 나름대로 얼마간 참다가 결국 폭발했다. 나는 가족을 최우선으로 평생을 헌신했는데, 이제 와 이런 태도를 보인다니 참을 수 없다고. 서로 걱정하지 말고 살자고.
가족회의를 제안하고 아빠가 고심해서 내놓은 방안은 ‘공유 주택’이었다. 각자 서로의 일상을 간섭하지 않고 각자의 일을 하는 형태. 지금의 형태는 엄마가 행복하지 않으니 우리 가족의 원 목표였던 행복을 추구하자고 했다. 제안까지는 좋았으나 구체적인 방안은 (내 눈에는 영) 엉망이었다. 밥은 알아서 먹을 거니까 신경도 쓰지 마! 근데 재료는 그냥 냉장고에 있는 걸 쓸 거야. 냉장고를 채우는 것부터 요리인 걸 아빠는 모르지? 거실 청소는 하고 싶지 않아. 아빠가 제일 오래 사용하는 공간인데? 비슷한 대화가 물처럼 흘렀고 회의는 아빠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빠는 결국 거실 청소를 하게 됐지. 아빠는 몰랐겠지만 아빠는 회의가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대화를 하러 왔다. 그래서 언니와 나는 아빠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 나는 영국에서 공유주택에 살아보았던 경험을 강조하며, 공유주택이라면 권리에 앞서 책임과 의무가 있음을 알렸다. 아무도 서로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라다는 사실도. 아빠는 힘들게 수긍을 했다.
회의가 끝나고 엄마와 언니, 나는 저녁을 먹겠다고 분주했는데 아빠는 소파에 망부석처럼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빠는 처음으로 자신의 생각대로 결론나지 않은 회의를 했다. 회사에서도 내내 상급자 였을테니,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을걸 안다. 아빠의 기본적인 틀은 존중했다. 할머니와 엄마 덕이든 아빠의 문제이든 아빠는 독립적으로 사는 힘을 길러야 한다.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가족의 연을 끊자는 말인가? 서로 걱정도 신경도 쓰지 않고 혼자 사는 길, 그 길을 따라갔다가는 가족 중 아빠만 혼자가 되고 나머지는 한데 모이는 구도가 될 터였다.
우리는 그저 아빠가 스스로 물을 떠 마시고, 가방을 챙기고, 화를 덜 내고, 상대를 이해해주길 바랐을 뿐인데 아빠는 세상이 뒤집어질 듯 혼자 고뇌를 한다. 자신도 자신의 생각을 통제할 수 없는지 이랬다 저랬다 반응이 다르다. 다정하다가도 갑자기 화를 내서 옆 사람은 좌불안석이다. 안 챙겨주면 이렇게 태도가 변했다고 화를 내고, 챙겨주면 신경 쓰지 말라니까 짜증 나게 한다고 화를 낸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나머지는 고민이 많다. 그치만 티도 못내. 말했다가는 관심 두지 말라고 한 소리 들을 테니까.
아빠는 오늘 아침에도 따뜻한 물을 챙겨주고 싶어 하는 엄마에게 신경 쓰지 말라며 와락 짜증을 내고 집을 나섰다. 나서는 발걸음이 산뜻하지도 않을 거면서 감당하지도 못할 화를 낸다. 다른 집을 보니 은퇴하는 아빠가 가정에 적응하는 과정이 3년쯤 걸리더라. 이 분위기를 3년이나 감내한다고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힌다. 자꾸 독립을 떠올리고 집의 시세를 생각한다. 나는 진심으로 도망치고 싶기 전에 아빠가 마음의 토양을 잘 다졌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더 지치기 전에. 무엇인가가 더 나빠져서 모이기 전에. 서로가 서로에게 행복이 아니라 부담으로 변해버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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