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나 리조트에서 조식을 먹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메뉴였다. 골프복을 입은 중년 손님이 많았다. 리조트의 규모가 크지 않아서 손님이 많아도 붐비거나 지치지 않았다. 좋은 물건이나 음식에 크게 감흥이 없는 남자친구도 시에나 리조트는 마음에 들어 했다. 식당을 나오며 테이크아웃 커피를 챙겨 왔는데, 마셔보니 콜드브루였다. 나도 꼭 돈 많은 중년이 되기로 결심했다.
귤 따기 체험을 운영하는 카페가 많았지만 제대로 된 체험을 하고 싶다고 주장하며 2000평 귤 농장을 예약했다. 도합 3kg을 딸 수 있었는데, 그게 얼만큼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가고 싶었지만 제주도의 버스는 시간표가 무색하게 제 멋대로 왔다. 택시를 타고 언덕을 올라갔더니 넓은 농장이 있었다.
귤은 생각보다 금방 땄다. 무작정 따기 시작하지 말고 여러 나무에서 맛을 보며 좋은 귤을 골라보라 하셨는데, 껍질 까기가 번거로워 겉만 보고 판단하기로 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댕글댕글 달린 귤이 예뻐서 귤과 남자친구의 사진을 자꾸 찍었다. 뒷모습을 찍으려니 펭귄처럼 걷다 손을 잡으라고 뻗는 게 보였다. 육체노동을 할 각오로 왔다가 20분 만에 미션을 끝낸 너는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이 틈을 타서 다음엔 감자를 캐보는 게 어떨까 제안했는데 칼같이 거절당했다.
점심을 먹으러 올레시장으로 이동했다. 인터넷으로는 대단해 보였던 수제버거집에 갔는데 웨이팅도 없고 그냥저냥이라 실망했다. 시장을 구경하려니 귤이 문제였다. 귤 3kg가 따기는 쉬웠는데 들고 다니는 게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더라고. 게다가 갓 딴 귤은 딴딴하고 맛이 덜해서 까먹어 없애버릴 수작도 부리지 못했다. 힘을 내서 제주벨미 육포와 할머니네떡집 귤모찌, 제주약수터 맥주, 한라봉주스를 샀고 너의 회사에 돌릴 과자도 한가득 챙겼다. 흑돼지 강정이나 다른 주전부리로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귤과 짐에 치어 체력이 바닥났다. 이때 좀 더 힘을 내지 못한 것을 저녁에 후회했다.
마지막 밤은 씨에스호텔앤리조트에서 묵었다. 독채인 게 특징인 동남아풍 숙소였지만 저렴한 디럭스룸으로 선택했더니 옆방과 같은 건물이었고, 방 자체도 작고 이튿날 아침에는 배수구 냄새도 심하게 났다. 시에나 리조트와 격차가 너무 심해 박탈감을 진하게 느꼈다. 집이 망하면 이런 기분일까? 숙소를 돌아다니며 구경할 생각으로 잡은 곳이었지만 지쳐버린 탓에 낮잠을 자느라 해가 져 버렸다. 그래도 냉장고에 빼빼로데이 기념 빼빼로가 두 개나 있었다.
저녁을 먹으러 나갈 기운이 없어 룸서비스를 시켰다. 39,000원짜리 마르게리따를 시켰는데 내 예상과 다른 피자가 왔다. 피자를 버려두고 맥주와 함께 모찌, 육포, 과자를 해치웠다. 남자친구와 끈기 있게 “I’m on observation duty 5”를 시도했는데 여지없이 실패했다. 아무래도 보안요원으로 취직하기는 어렵겠어. 수탉 영상을 보다 스르륵 잠들었고, 후에 듣자 하니 코도 좀 골았다고 한다. 우르르 쾅쾅. 별 거 없는데 소중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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