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을 먹고 일찍 숙소를 나섰다. 바다 앞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후에 보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마지막날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벌써 아련했다. 남자친구와 함께면 평범하게 흘러갈 시간에 의미가 새겨진다. 대단한 게 없어도 소중한 시간.
여행 전부터 마지막 날에 무엇을 할지 고민했는데 결국 마음에 드는 안을 세우지 못했다(귤 따기 체험을 미리 해버린 탓도 있지). 남자친구는 맛집이나 일정에 얽매이지 말고 편히 시간을 보내다 가자고 했다. 너는 사진에 흥미가 없고, 남들이 좋아하는 맛집에 관심이 없다. 게다가 자연에도 큰 감흥을 느끼지 않았다. 집안퉁이 방구석여행자 둘은 남들 따라 하려다 스트레스받지 말고 내내 깨지 못한 게임을 깨기로 했다. 가까운 중문 스타벅스에 걸어갔다. 걷는 30분 남짓을 신나게 낄낄댔다. 맛집보다 이런 게 소중한 여행이지.
카페에서 두어시간을 게임에 집중했다. 이럴 거면서 금요일에는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나는 왜 한 치 앞도 보지 못할까? 제주도에 비행기 타고 가서 스타벅스에 자리 잡고 게임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숨 쉬는 것도 잊게 재미가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기분은 기분이고 게임 실력은 게임 실력이죠? 남자친구와 눈알 네 개를 굴렸지만 한 판도 깨지 못했다. 제주도 특화 말차라떼를 마셨다. 쌉쌀한 게 입맛에 딱 맞았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추천받았던 고기집 숙성도가 있었다. 오픈보다 15분쯤 전에 갔더니 웨이팅 없이 열자마자 입장했다. 맛집에 집착하지 않았더니 더 쉽게 먹는 것 같았다. 숙성도는 신시가지의 흑돼지집보다 훨씬 맛있었고, 볶음밥의 감칠맛이 훌륭했다. 누군가를 데려와야 한다면 부끄럽지 않을 곳이었다.
식당과 가까운 곳에 공항으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마침 시간도 맞아서 여유 있게 탔다. 창밖을 보노라니 제주도에 있던 시간 중 처음으로 비가 왔다. 이제 그만 서울로 가야 한다는 신호인가. 제주도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보다 24시간 붙어있던 너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더 슬펐다. 4년 만의 여행이었는데. 너를 가득 충전할 수 있어서 기쁜 시간이었다.
제주공항에서 우리다운 기념품을 샀다. 비싼 향수를 사달라고 해 봤는데 네가 들리지 않는 척을 했다. 비행기를 타러 나갔더니 바람이 칼날같이 매서웠다. 그날 한라산에는 첫눈이 쌓였다고 했다. 김포공항에서 서로 다른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갔다. 다음 주말에 또 볼 거면서 오랫동안 못 보는 양 울적해지려 했다. 내가 너 없이 살 수 있을까. 남자친구와 함께 라면 따뜻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알토란 같은 제주의 4일이 그렇게 지나갔다.
사랑해 진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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