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VIEW/BOOK

[Book Review] 세상 끝에 살고 싶은 섬 하나 - 김도헌

by 푸휴푸퓨 2016. 5. 29.
728x90
반응형

 

 

(에세이긴 하지만 어쩐지 스포일러가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한 리뷰이니 원치 않으시면 읽지 않으시길 권합니다:D)

 

  요즘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가 유행이라고 한다. 제주도는 육지인에게 지상 낙원이니, 제주도보다 더 나아간 세상 저 끝에 있는 섬에 사는 사람은 얼마나 여유로운 삶을 살까. 제목을 보고 생각한 건 휴양지에서의 여유로운 삶이었다. 그러나 책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깜짝 놀랐다.

 

 

마당 저편 주인집에서 집 안을 왔다갔다하는 루이사가 보이고

마당에는 닭 몇 마리와 병아리 무리가 종종대며 잔디밭을 쫀다.

나는 내 혼쭐을 다 풀어헤쳐버리고 야자나무 아래 주저앉아 눈을 감는다.

지금 나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추크 섬에서 사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라고 쓰고 추크 섬은 커녕 미크로네시아 연방이 어드메인지도 잘 모르겠다고 고백하겠다.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 곳에서 화자는 동료를 잃고 실의에 빠진다. 천국같은 풍경을 가진 곳이지만 친구가 죽고나니 어쩐지 모두가 잔인하다.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절망하는 화자를 잡아주는 건 무슨 이유에선지 현지인들은 모두 겁내는 베네딕, 한 사람 뿐이다. 덕분에 그는 그곳에서 계속 살아간다.

 

 

천국은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천국이 아닙니다. 그냥 일상일 뿐이죠. 천국은 나그네들이나 느낄 수 있는 거겠죠.



  잠깐 들르는 방문객에게 추크 섬은 천국과 다름이 없다. 천국에 살아서 좋겠다는 상투적인 말에 대한 그의 대답은 인간은 어디서나 현실에 발 붙이고 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다. 천국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꼭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유태인에게인가? 누군가 "당신들의 천국은 사람도 많고 지저분하고 더러울 것이다"라고 했더니 그 말을 들은 이가 "당신들의 천국은 깨끗하고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는 짧은 일화. 결국 천국에 모이는 것도 사람일텐데, 그럼 그곳은 여기와 얼마나 다를까. 저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가끔 천국 생각을 하곤 한다. 천국은 마음에 달렸다는 상투적인 결론 말고 아직 얻은 것은 없다.



부처가 다시 세상에 온다면 그때는 분명 테이블 산호 위에 앉아 도를 얻고 해탈할 것만 같다.

 

 

  그러나 추크섬이 아름답다는 것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얻는 마음의 위안이 분명 있을 것이다. 서울은 대체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 도시는 아니지만, 가끔 파란 하늘을 볼 때나 경복궁에 단풍이 들면 여기도 꽤 좋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하늘이 파랗기만 해도 만족스럽다면, 추크섬에서는 테이블 산호 정도는 보아야 하겠지.


 

경쟁은 내가 생존할 수 있는 선까지, 양보는 나의 생존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까지.

 

 

  천국이 어디든 장소는 상관이 없다면 남은 건 마음 뿐이란 걸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너무 힘들게 경쟁하지는 마. 생존이 우선이고 네 마음이 먼저야, 라고 말해주는 베네딕이 있는 추크섬이 천국으로 보이는 것은 그런 위안 때문이겠다. 이 서울에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봐주면서 이런 말을 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나? 나는 감히 이런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있는 힘껏 달려도 뒤쳐지기가 십상인데, 좀 천천히 가자고 말하면 그 친구를 망칠지도 모른다. 아, 역시 추크섬은 천국인가보다. 

 

 

짙푸른 숲, 시퍼런 바다, 강렬한 태양이 전부인 세상에서 사는 것은 차라리 시간을 잊는 일이다.

(중략) 그리고 이곳에 살면서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용서하고 내가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내 존재만큼의 기쁨만 느끼고

내가 닿지 못하는 것들은 그냥 그곳에 두고 무심해지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도 해버렸다.

 

 

  그림같은 풍경 안에서도 추크섬이 감히 천국이라 말하지 못하는 저자는 시간을 잊고 내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결론만을 내린다. 생각이 참 많은 사람이야. 그런 것이라면 서울에도 할 수 있을까. 많은 기쁨을 바라지 않고 내가 닿을 수 있는 것에서만 행복해야겠다,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 매일 생겨나면 결국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때로 대단한 행복이 부러워 내 생각이 초라해 보일 때도 있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이렇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곤 한다. 역시, 마음에서 허영을 빼야해. 

 

 

그리고 슬픈 건 잘 모르겠어. 어떤 감정인지.

그때 쏘렌이 죽었을 때도 그랬지만. 그냥 생각이 없어져. 다만 갑자기 한쪽 발이 짧아져버렸어.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다보면 짧아진 한쪽 발 때문에 갑자기 휘청거리는 거야.

술을 마셔도 짧아진 발은 자라나지 않고, 밥을 먹고 잠을 자도 자라나지 않아. 그냥 계속 길을 걷다가 휘청대.

그럼 깜짝깜짝 놀라지. 아마 백 밤은 더 자야지 두 발이 같아질거야.

옛날에도 그랬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걸을 때 더이상 휘청대지 않았어.

백 밤만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걱정하지마.

 

나는 목이 멘다.

 

 

  책의 끝에 베네딕이 죽는다. 베네딕이 죽어가며 작가에게 남겨준 말, 추크 섬 고유의 믿음을 나는 진정으로 믿어야 할 지 모르겠다. 이건 분명 에세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그렇다면 이건 정말 작가의 경험인지. 먼 곳에 살며 현지인과 동화된 이의 새로운 믿음인지 서울 한복판의 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자신의 남은 힘을 모두 넘겨주고 가던 베네딕과, 그를 잃어 슬퍼하던 사람들과, 다리가 짧아져버린 이의 이야기에 나도 목이 멘다. 슬픔에 겹다는 것을 한쪽 발이 짧다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세계가 나의 세계가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서로의 자리에서 꿋꿋하게 살아가기를.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