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VIEW/BOOK

[Book Review] 글쓰기의 최전선 - 은유

by 푸휴푸퓨 2019. 4. 8.
728x90
반응형

글쓰기의 최전선, 은유

 

  유유출판사에서 출판된 은유 작가의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지는 몇 달이 되었는데,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막상 직접 책을 집어 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 번 은유라는 이름을 알고 나니 여기저기서 들리더라고. 글쓰기 관련해서 많이 나오시는데, 들어야겠는데, 읽어야겠는데... 하던 차에 아름다운재단에서 문자가 왔다. 기부자들을 대상으로 은유 작가의 강연이 있다나(신청정보를 찾아보니 꼭 기부자만 들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주 소액이지만 기부하고 있다는 기쁨도 누릴 겸, 관심 가던 작가의 강연도 들어볼 겸 바로 강연 참석 신청을 했다. 그러니 어쩌겠니. 급하게 읽어야 하는 게 아니겠니! 강연 전에 최소한 2~3권은 읽고 싶어서 되는 대로 먼저 한 권 골라 들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글쓰기의 최전선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일단 쓸 것. 써야 쓴다.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문장을 쓰고 그걸 다듬어서 문단을 만들고 그 문단의 힘으로 한 페이지 글을 완성할 수 있다.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서 영감을 기다리고 지적 자극을 위해 벤야민을 읽고 벤야민을 읽다 보면 마르크스가 궁금하고 마르크스를 공부하려면 자본론을 펴야 하고.... 무능력에서 출발하면 글은 영원히 쓸 수 없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초라하게 느껴져도 자기 능력에서 출발하기. 일단 써봐야 어디까지표현이 가능한지, 어디가 약한지, 어디가 좋은지 알 수 있다. 글쓰기 초기 과정은 보다 이다.

 

  가끔(이라고 쓰고 상당히 자주로 읽는다) 내가 인터넷에 의미 없는 말의 찌꺼기를 흩뿌리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엄청난 깊이가 있지도 않고 아무에게도 유용하지 않을, 내 생각이 덕지덕지 가득한 글을 올린다. 서버의 낭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치솟는다. 그럼에도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억지로 마음을 다잡으려 한다. 일단 뭐라도 써야지. 뭐라도 되겠지.

 

나도 그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한된 삶의 조건에서 한정된 독서를 한다. 만나는 사람을 계속 만나듯이 읽던 책을 주로 읽는다. 그간 읽어왔던 이물감 없이 술술 책장이 넘어가는 책들 위주로 본다. 그것이 참다운 독서일까. 앞서 카프카가 말한 내면의 얼음 바다를 더 단단히 만드는 책 읽기. 자아가 유연해지기보다 고집스러워질 가능성이 많지 않은가. 그건 약일까 독일까.

 

  하! 나는맨날 읽는 책 분야만 좋아한다는 상당히 오래된 고민이 있다. 나와 결이 맞는 저자의 책만 계속 읽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걸 크게 깨달은 것이, 최근 아빠에게 추천해주고 싶을 책인가 싶어 어느 중년 남성분의 에세이를 빌렸다. 그런데 내 마음과 꼭 맞지 않으니 (꼰대같은 태도라 맞지 않는 게 아닌데도) 진도가 나가지를 않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싶으면서도 읽지 말까, 그래도 다 읽을까 계속 고민했다. 이제까지 에세이가 술술 읽혔던 건 내 마음 같은 이야기만 하는 에세이를 읽었기 때문인 거야. 그 세계가 전부가 아닌데 마음이 많이 협소해졌음을 느꼈다.

 

  꼭 에세이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대체 과학이나 경제 분야 등등의 책은 눈에 들어오지를 않아! 몇 주 전 일요일에는 물리학 교양서적 하나를 잡고 읽어보려 했다. 그리고 낮잠을 세 번이나 잤지. 이래서는 뭐를 읽기도 전에 기면증이 생기겠는 거다. 그래서 또 읽고 싶은 책만 읽어댔는데, 이렇게 책 속에서 망치로 뼈를 맞는다. 이건, 독이겠죠? 빠르게 완독을 할 수 없어도 계속 시도를 해야겠다고 눈물을 훔치며 다짐해본다.

 

글쓰기 수업에서 가끔 단문 쓰기신공을 펼치는 학인들을 본다. 단문의 빠른 전개는 속도감 있게 읽히지만 때로 너무 끊어쳐서 이야기가 시작되다 끝나버리는 허무감을 주기도 한다. 특히 낭독해보면 금방 안다. “지금은 삶이 내 것인지 두렵다” “사람을 만날수록 외로워졌다같은 경우처럼 “~했다” “~이다라는 문장이 잇달아 나오는 글은 흐름이 탁탁 끊겨 이야기가 흩어진다. 복잡한 문장과 마찬가지로 앙상한 문장도 메시지 수용에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다.

 

  또 망치 나오신다. 글을 쓸 때 가장 큰 걱정 중 하나가 바로 문장의 길이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문장을 길게 쓰고 쉼표(,)를 넣는 습관이 있었다. 논술 선생님에게 문장을 짧게 쓰라고 교육받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긴 문장 치고 읽기 거슬리지 않는다는 평가도 들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뒤의 말에 더 집중했고 습관은 고쳐지지가 않아서 지금도 정신을 놓으면 세 줄은 금방이다. 그렇지만 20살 이후 읽은 수많은 글쓰기 책이 문장은 짧게!”라고 조언한 터라 이제 나는 고집을 꺾었다. 요즘은 문장을 일단 쓰고 다시 읽으며 마구 잘라낸다. 한 문장이 한 줄을 넘어가면 안돼! 그랬더니 문장 하나에 담긴 내용이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내가 앙상한 문장을 쓰고 있었구나,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적당히의 적당은 또 어디인지 미로를 헤매야겠다.

 

좋은 글은 질문한다. 선량한 시민, 좋은 엄마, 착한 학생이 되라고 말하기 전에 그 정의를 묻는다. 좋은 엄마는 누가 결정하는가, 누구의 입장에서 좋음인가, 가족의 화평인가, 한 여성의 행복인가. 때로 도덕은 가족, 학교 등 현실의 제도를 보호하는 값싼 장치에 불과하다. 일상의 평균치만을 관성적으로 고집하며 살아가는 순치된 개인을 길러낸다. 하지만 평균적인 삶도 정해진 도덕률도 없다. 천 개의 삶이 있다면 도덕도 천 개여야 한다. 자기의 좋음을 각자 질문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게 중요하다.
깨소금을 치듯 글도 기어코 교훈으로 마무리하는 사람이 있다. 오늘 하루도 참 알차게 보냈다, 오늘도 참 재미있었다 같은 그림일기형엔딩 처리인데 글이 식상해지는 지름길이다. 기껏 자기 경험과 생각에 근거해 잘 써놓고 교훈적인 이야기로 마무리하면 글이 평범해진다. 그런데 이 교훈적인 마무리도 습관이다.

 

  나는 틀에 박힌 학생이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말은 곧이곧대로 전부 믿었다. 그 틀을 깨고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아직 글에서는 어쩐지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만 할 것 같고, 의미 있는 말을 하나 남겨야만 할 것 같다. 나의 좋음을 잘 정의하고자 오랜 시간 노력하고 있다. 이제 그것을 기준 없이 모든 곳에 흩뿌리지 않도록 또 함께 노력해야지(, 노력하자는 이 말도 식상한 결론의 습관인가!).

 

문제의식이란 거창하지도 까다롭지도 않다.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이다. 의문이다. (중략) 가슴에 물음표가 많은 사람이 좋은 글을 쓸 가능성이 많다. 작은 자극에도 촉발을 받고 영감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물음표가 어느 순간 느낌표로 변하고 다른 삶의 국면을 통과하면 그 느낌표는 또 다시 물음표가 된다. 내가 이렇게 믿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이 찾아드는 것이다. 그 물음표와 느낌표의 반복과 순환이 자기만의 사유를 낳는다.

 

  박웅현 작가는 촉수를 세우라 했다. 감수성이 예민하거나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작가라는 말도 어디선가 들었다. 그리고 이제 가슴에 물음표가 많아야 좋은 글을 쓴다는 말을 읽는다. 세상에 관심을 가지는 일이 힘겹고 지겨울 때가 있다. 신경을 끊어버리고 무감해지면 훨씬 편하다. 그럼에도 그리 살아서는 안 되는 거라서 열심히 기웃거리려고 노력을 한다. 궁극적으로는 진심으로 물음표를, 촉수를, 공감을 띄우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테다. 일단 지금은 가만히 있는 사람보다는 억지로라도 하는 사람이 낫다고 나를 위로해 본다.

 

딱 이만큼이다. 생의 모든 계기가 그렇듯이 사실 글을 쓴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런데 전부 달라진다. 삶이 더 나빠지지는 않고 있다는 느낌에 빠지며 더 나빠져도 위엄을 잃지 않을 수 있게 되고, 매 순간 마주하는 존재에 감응하려 애쓰는 삶의 옹호자가 된다는 면에서 그렇다.

 

  책 리뷰입네 뭐입네 하며 무언가를 쓰겠다고 시간을 투자한다. 그 노력으로 인해 세상이 변할 일은 거의(를 붙여 미약한 자존심을 세워본다. 아예는 아니겠지.) 없다. 그러나 아무것도 쓰지 않는 나와 무언가를 쓰는 나는 다름을 오직 나만은 알아서, 리뷰를 쓰지 않아도 혼자서 일기만은 놓지 않았다. 적지 않으면 그냥 흘러갈 시간을 글에서는 붙잡아 둘 수 있었다. 가만가만 되짚어 읽으면 이 아까운 순간을 흘렸으면 어쩔 뻔 했나 싶기도 했다. 그러다보면 때로는 일상 속에서 일기에 쓰고 싶은 순간을 자꾸 잡아내게 된다. 시간을 그냥 흘리지 않기 위해서 무언가 쓰지만 또 그 씀으로 인해 시간을 더 촘촘히 산다. 딱 그렇게 나만 알 정도로 내 글은 유용하다. 그래서 놓지 못한다.

 

  책을 읽으니 작가님이 진행하는 글쓰기 강좌가 듣고 싶어져서 강좌를 찾아보았다. 와우, 횟수와 매번의 첨삭을 생각하면 몹시 합리적이면서도 나에겐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슬프지만 조용히 미뤄두었다. 다만 혼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천천히 읽어보려 한다. 마음에 다가오는 문장은 필사도 하며, 의미도 오래 곱씹어 보리라(여럿이 함께 읽어야 좋은 책이라고 적어두셨긴 하지만 할 수 없지. 일단 할 수 있는 부분을 해야지!).

 

  곧 듣게 될 강연의 주제가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기인지라 어쩐지 최근 어크로스에서 나온 다가오는 말들을 읽어야 할 것 같기는 한데 여의치가 않다. 강연이 엄청나게 엄청나게 기대가 된다. 다른 책이라도 좀 더 읽어봐야지. 일단은 쓰기의 말들! 책이여 나에게 오라!

 

글쓰기의 최전선
국내도서
저자 : 은유(김지영)
출판 : 메멘토 2015.04.27
상세보기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