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부끄럽지만 방콕이 태국의 수도라는 것도 안 지 그리 오래 된 것은 아니다. 방콕은 방콕으로, 태국은 태국으로 알고 있었을 뿐. 이 책을 읽고 나서 방콕이 태국의 수도인 것을 알았나, 알고 나서 읽었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몰라. 난 세계의 수도를 외우지는 못한다(뇌가 순수하다!).
'On The Road'라는 책을 고등학생 때 읽었다. 한창 한비야의 여행 에세이에 빠져 있었기에(개정판의 세련된 표지를 보면 신기하다) 그 제목에 홀려서 샀을 듯 싶다. 지금 생각하면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책을 그렇게 많이 사달라고 졸라댄 딸의 말을 잘 들어주신 엄마가 신기하다. 아무튼 그렇게 졸라서 얻었을 책에 틀림없다. 읽고 또 읽었고, '여행자'라는 것에 엄청난 기대를 품게 되었다. 인터뷰 한 모든 이들이 신기했던 것은 아직 내가 삶에 대한 내 스스로의 생각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나 엄청나다니, 여행자는 어마어마하구나. 뉴욕에 관한 책 '네 멋대로 행복하라'(제목이 개정되었지만 난 이게 더 좋아)도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꿈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유분방하면서도 확고한 삶, 작가가 소개해주는 엄청나게 감각적인 가게들, 미술관들. '언젠가 이 사람들처럼 살 수 있을까'라는 꿈도 꾸지 못할 만큼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그리고서 한동안 이 작가의 책을 읽지 않았다. 뭐, 왜 그랬는지 구태여 한 번 생각해 보자면, 고등학생 때는 바이블처럼 책 속 인물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받아들였다면 점점 머리가 커졌다고 해야 하나. 내 생각을 키워나가고 싶었던 것 같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지겨웠지(건방져!). 그렇게 이러구러 시간이 지나고 뉴욕 여행을 하게 되었을 때 살펴보니, 작가가 소개한 엄청난 감각의 가게들이나 미술관들은 대부분 나의 취향과 맞지 않았다. 뉴욕 책 속의 자유분방한 삶도 나와 맞지 않는다고 점점 느꼈고. 바이블이 그냥 책으로 내려온 순간이었다.
뉴욕 책이 제목이 바뀌어서 나온 것을 안 순간 작가가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왠지 실망에 빠져(더 직설적으로 이건 뉴욕에 관한 책이야!!라고 외치고 있지) 신간이 나온 것을 알면서도 그냥 지나갔다. 그러다가 이 책을 읽었다. 출판사 이름 때문에 고른 것이지 큰 기대를 하고 읽은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다시 한 번 마음이 뛰었다. 뉴욕에 가고 싶었던 것 처럼 방콕에 가고 싶어졌고, 그 안의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래서 너무 반가웠다.
이렇게나 길게 이 책을 왜 읽게 되었는지, 왜 이 작가를 이야기하고 싶은지 말한다. 이제는 책 속의 인물들을 무조건 동경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제 정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그 이야기를 멋지게 잘 풀어놓은 책이 박준 작가의 책이고, 심지어 작가 본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참 좋다. 감각적인 가게들을 찾아다니는 것도,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외국인들과 대화를 나누려고 시도하는 것도 솔직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니지만, 그의 이야기를 따라다니는 것은 좋다.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에 고민을 하던 와중에 그에 대한 마음에 드는 답을 발견해서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그 구절은 이미 블로그에 올려 놓았다).
방콕은 신기한 도시다. 책 속의 방콕의 국제적인 분위기는 뉴욕과는 또다른 느낌이 난다. 뉴욕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모든 것을 포용해 내는 그 분위기는 정말이지 잊을 수 없다. 도쿄는 큰 도시지만 국제적인 곳이라는 생각하지 않는다. 상하이는 엄청 발달한 도시라던데 내가 생각하는 국제적인 분위기가 날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이 책을 읽고 한껏 기대하며 다음 달에 방콕으로 여행을 간다. 난 그렇고 그런 관광객이 될 태세를 한껏 갖추고 있기 때문에 작가가 한 것처럼 멋진 가게들을 찾아다니지도, 그 가게의 주인들과 대화를 하지도 않을거다. 그렇지만 기대가 된다. 방콕은 국제적인 도시일 것이다. 오랫만에 한 번 그 '국제적인'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 그 안에서 자유롭고 싶다.
나는 박준이라는 사람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지도, 곁에서 친하게 지내고 싶지도, 작가 사인회에도 가고 싶지 않다. 그냥 같이 있으면 이 사람은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느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박준이라는 작가가 정말 좋다. 이 사람이 하는 인터뷰가 좋고, 이 사람이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 좋다. 계속 여행하면서 세계 곳곳의 사람들과, 가게들과, 삶의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으면 좋겠다. 한 번씩 책을 내 주었으면 좋겠다. 나도 한 번씩, 계속 읽고 싶다.
p.s.
암파와는 방콕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지만, 거대 도시 방콕과는 완전히 다른 시간이 흐른다. 여기서 보내는 1시간과 방콕에서 보내는 1시간은 완전히 다르다. 방콕의 시간이 빠르게 정신 없이 흐른다면, 여기서는 아주 느릿느릿 그리고 고요하게 흐른다. 시간에 종류라는 게 있다면 완전히 다른 종류다. 사람들은 대개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평생 한 가지의 시간으로 살아가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의 종류는 의외로 많은지도 모른다. 여행을 하면서 이렇게 다른 시간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 박준, 방콕여행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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