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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2025.10.22. 흘러간다 가을가을

by 푸휴푸퓨 2025.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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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L로 광명 찾자

  하루에 18,000 보도 넘게 걸었던 일요일, 내가 힘들다고 누가 다음 주 도시락을 만들어주는 건 아니어서 지친 몸을 일으켜 억지로 요리를 했다. 요리라고 해봐야 볶음밥이나 하고 브로콜리를 삶고 주방을 정리하고.. 대단치도 않은 것들을 하는데 두어 시간이 흘렀다. 편안한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이 힘에 겨울 때가 있다. 회사와 살림을 해내려면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내가 시지프스인지 시지프스가 나인지, 똑같은 일을 하고 또 하고...

  설거지를 하고 일반쓰레기만 묶으면 오늘의 일이 끝날 참이었다. 5L 종량제 봉투에 쓰레기봉투를 밀어 넣는데 무엇에 걸렸는지 팍, 하고 봉투가 찢어졌다. 아. 구멍이 난 것도 아니고 한 뼘 이상이 찢어진 꼴을 보니 고통 같은 분노가 밀려왔다. 나 힘들다고 정말. 무슨 일이냐는 너의 말에 대답도 할 수 없게 괴로워서 몇 초쯤 가만히 있었다. 별 일 아니야. 봉투가 찢어졌어. 새로 넣으려고. 괜찮은 척 말하려고 했는데 전혀 괜찮지 않았나 보다.

  달려온 너는 테이프만 붙이면 아무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자기가 이런 일을 많이 해 보았다나. 대체 어디서 해보았다는 건지, 어이없는 웃음이 오히려 크게 터져 나왔다. 테이프를 가져다주니 봉투를 잘 여민 네가 이렇게 붙이기만 하면 아무 일도 아니라고 나를 다독였다. 사실이었다. 아무 일도 아니지. 아무 일도 아니야. 그래서 순식간에 아무렇지도 않아 졌다.

  일상의 시간은 참 평범하다. 흘려보내면 대체로 별 일이 없다. 그러나 그 순간 네가 “그러니까 잘 좀 하지”라고 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이런 일은 잘한다며 나서주는 사람이라 값진 순간이 된다. 그런 사람이라 고마워. 고마워. 분노의 기억을 고마움의 기억으로 바꾼 뒤 앞으로는 10L짜리 봉투만 사겠다고 결심했다. 이깟 일로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아!

18000보 걷는 와중에도 이틀이나 찾아갔던 멋진 동네 축제

 

 

2. 다꾸박스를 봉인하며 '이거 열면 인생 망한다'고 썼던 것 같은데..

  다이어리 꾸미기를 다시 해보기로 결심했다.

  원래도 오리고 붙이기를 좋아했다. 고등학생 시절 다꾸에 빠져서 온갖 잡지를 수집하고 스티커를 모았다. 작업에 심취해 동이 틀 때까지 꼼지락 거리기도 했다. 매일 문방구를 기웃거렸다. 다꾸에 특화된 다이어리를 샀고, 내가 꾸민 다이어리를 반 아이들이 돌려보며 구경했다. 포토샵을 할 줄 몰라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몰라. 다꾸를 직업으로 삼으려면 잡지 에디터가 가장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장래희망 란에 그대로 적기도 했다(대학 진학에 도움이 안 되어 보였는지 담임 선생님에 의해 강제로 수정되었지만). 다꾸에 너무 심취해 공부를 등한시하는 내가 걱정돼 고3 동안 다꾸 박스를 스스로 봉인했다.

  대학교에 올라가서도 다꾸를 놓지 않았다. 학창 시절만큼 심취하지는 않았는데, 주 재료로 삼았던 잡지, 그러니까 패션 생태계의 문화가 나와 맞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미니멀리즘을 따르려니 그간의 노트는 다 짐으로 보이지 뭐야. 꾸미기만 했지 속 빈 강정 같다는 생각에 미련도 없이 싹 버렸다. 이후로도 스티커를 좋아했지만 환경 측면에서는 쓰레기를 양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스스로를 꾹꾹 눌렀다.

  아이패드가 부흥하며 다꾸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줄 알았는데, 유튜브와 숏츠의 시대가 오고 탑꾸가 유행하나 했더니 급기야 다꾸가 나의 알고리즘으로 들어왔다. 세상에, 요즘엔 다양한 스티커를 이렇게나 저렴하고 쉽게 구할 수 있구나. 사진첩의 사진을 개인이 쉽게 뽑을 수 있고 온갖 배경지가 염가에 팔렸다. 나도 하고 싶은데. AI의 시대, 50살에 은퇴를 꿈꾸는 나, 무엇을 하면서 자유로워진 시간을 써야 할까 생각하다 인생에서 손에 꼽게 미쳐있었던 다꾸가 떠올랐다. 오래 안 해서 손이 무뎌진 것 같지만 뭐 어때? 마침 들른 다이소에서 탐내던 다꾸 용품을 찾았다. 그래, 나 좋으라고 하는 일이니 서툴러도 시작해 보기로 했다.

  집에 있던 재료로 두 페이지를 꾸몄다. 솔직히 봐주기 어려울 만큼 형편없었지만 괜찮아. 앞으로 일상에서 재료를 모으고 마음에 드는 펜을 만나면 된다. 일상을 촘촘하게 즐기려면 재미있는 것이 삶에 많이 포진시켜야 한다. 취미를 되찾아보자 이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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