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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다시 처음인 것처럼

by 푸휴푸퓨 2016.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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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깐 꿈을 꾼 것도 같다. 꿈이란 무릇 잠 속에서 겪는 일과 내가 이루고 싶은 일을 모두 이르는 말이니 꿈을 꾼 것이 맞겠다. 나는 밤에도 꿈을 꿨고 낮에도 꿈을 꿨다. 그런 나를 다시 세상이 흔들어 깨운다. 일어나. 네 현실은 여기야. 어디에 가려고 그래.

  있지도 않은 실력에 마지막까지 간 것이 다행이겠지. 떨어진 것을 두고 '이렇게 완벽한 나를 떨어뜨리다니 너네 정말 실수하는거야!'라고 외칠 호기가 없기에 세상에 불만을 가질 수도 없다. 그냥, 그냥 난 또 그렇게 제자리로 돌아올 뿐이다. 내 제자리가 이곳이라는 것이 싫지만, 점점 익숙해지기도 하고. 담담하다기 보다는 침잠한다는 것이 맞겠다. 조용히 가라앉고 또 가라앉는다. 어느 순간 아무의 눈에도 보이지 않을지 몰라.

  혼자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어 오키나와에 갔던 지난 12월, 원래 가려 했던 섬의 페리가 결항이 되면서 아무 정보도 없는 아구니섬으로 들어갔다. 비가 쏟아지고 배는 요동쳤다. 뒤집힐 만한 크기의 배가 아님에도 뒤집힐 걸 걱정했다. 일본어 지도와 씨름하던 나를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가 해변으로 데려다 주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작은 섬에서도 내륙만 들여다보다 돌아갔을런지 모른다.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해변에는 성난 파도와, 비와, 그런 비조차 막을 생각을 못하게 하는 바람만이 있었다. 그래도 해변은 밟고 싶어 모래로 나갔는데, 5분쯤 지나자 비바람이 치는 날에 섬 해변을 보겠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너무 멍청해서 웃음이 나왔다. 아니, 웃음은 이미 오는 배 안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모래에 발은 푹푹 빠지고, 그런데 바위는 또 왜 이리 많은지. 아무도 없는 곳, 부를 사람은 커녕 전화를 걸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발목이라도 삐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걷고 또 걸었다. 죽을거라고 생각하니까 앞으로 가기는 갔다. 이 해변에서 나가는 길이 설마 들어온 그 길 뿐인건가, 그럼 이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하나, 지금이라도 돌아서야 하나? 웃음이 아니라 울음이 나오려 했지만 그래도 앞으로 나갔다. 결국 도착한 해변의 정 반대편 끝에는 길이 있었지. 언제 두려웠냐는 듯이 잘 포장된 길로 들어와서, 마치 오래 알던 길인 양 항구로 능숙히 걸어갔다. 매표 아저씨가 비바람에 엉망이 된 내 모습을 보고 웃었다. 나도 웃었다. 오키나와 본섬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나는 정말 단잠을 잤다.

  다음날 못 본 해변이 아쉬워 도심지 근처의 작은 해변에 갔다. 마음씨 착한 할아버지가 친구가 없냐며 말을 걸어주었다. 오래도록 말씀하시기에 장사를 하시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대만에서 왔다는 세 명의 여자들이 온 두 시간짜리 대화의 마지막에 알았다. 내가 외로워 보여서 친구가 있었으면 싶은데, 일본어를 못하는 내가 어쩌다가 그분에게 '당신은 친구가 아니에요'란 뜻을 전했고, 그래서 친구가 될 만한 사람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는 걸. 나는 공항에 가야했기에 그 여자들과 친구가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말도 안되는 일본어로 된 '나는 지금 공항에 가요'란 말을 알아듣고 잘 가라며 내 이름을 불러주던 할아버지를 나는 오래 기억하기로 했다.

  지금 나는 나를 끌어당기는 모래에 발이 푹푹 빠지고 있다. 여기는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많아서 주저앉을 수도 있고 되돌아 갈 수도 있다. 발목이 삔 척 하면 부모님은 날 부축해주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주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나가는 길만 찾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능숙한 척 걸어갈거고, 단잠도 잘 수 있을거고, 마음씨 착한 할아버지를 만날지도 몰라. 그럼 이 시간도 오래 기억할 날이 되겠지. 이 길을 다 걸어가도 내가 만날 것들은 별 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하니까, 되돌아간 길에서 만날 별 것 아닌 것들보다 훨씬 행복하게 해 줄테니까. 그러니까 침잠도 담담인듯 참고 걸어가보자고. 다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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