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해서 무언가를 쓰는 것은 위험하지만 아직 정신줄 정도는 붙잡고 있다는 마음으로 일단 시작한다.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은 절대 술을 이길 수 없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조심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어쩌면 그건 술에 취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정신줄이 안붙잡혀 있다는 말이다. 아니야. 내 정신줄은 아직 잘 있다.
며칠 전, 올 봄 마지막으로 선선한 밤일 것 같던 밤에 스무살의 내가 매일 걷던 길을 버스로 지나쳤다. 그 길은 예쁘지도 않았고 내가 좋아하는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추억이랄 것도 딱히 없다. 다만 그 전년도까지만 해도 전혀 몰랐던 모습의 서울을 보는게 좋아서 무작정 나다니던 내가 매일 걸어가던 길이다. 그 길을 걸어가 다른 곳으로 닿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길.
대학교 3학년 정도부터라고 할까, 이미 세상 탐방따위 할 여유가 없던 나는 그 길을 점점 잊고 살았다. 다닐 이유가 없었던 길, 정확하게는 다닐 쓸모가 없었던 길. 그 길은 생산적이지도 심미적이지도 않았으니까. 못난 길이었다. 아쉬워 한 적도 없이 기억에서 잊어버렸다.
그래서, 그러니까 말이다. 그 길을 몇 년만에 다시 버스 안에서나마 재회했을 때 내가 그리움을 느낀 것이 나 자신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겠느냐고. 내가 그 길을 걸으며 느꼈던 감정이 그대로 생각이 나는거야. 아, 그런 생각을 했었구나. 싱그러웠네. 스무살이라서 참 예뻤겠다.
그리고 오늘 혼자서 다시 그 버스가 타고 싶었다. 정말로 끝물인 5월의 밤바람을 맞으며 그 길을 보고 싶었다. 길이 아니라 길을 걷던 몇 년 전의 나를 다시 만나고 싶었겠지. 새로운 세상이 나에게 와줘서 너무 행복했던 때, 스무살이라고 자랑처럼 말하면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던 때, 사랑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없었던 때. 다시는 오지 않을 스무살과 나와 그 친구들까지.
무심하게 현재의 사람들과 헤어져 버스를 찾아갔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전화가 왔다. 결국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그리고 미래가 될 사람들과 시간을 엮었다.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아프다. 아무리 그리워해도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걸, 앞으로 가는 게 중요하다는 걸 내 자신이 스스로 증명해 보인 거잖아. 길도 버스도 시간도 이미 내 것이 아니다. 지나쳐서 앞으로 가야한다는게 아팠다. 새로운 사람들이 좋지 않다는 게 아니야. 단지 나는 오늘의 나보다 몇 년 전의 내가 되고 싶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스무살의 시간을 느끼게 해 줄 누군가와 연결이 되고 싶었는데 전화 할 사람이 없었다. 같이 길을 걷던 친구들에게 걸고 싶었는데, 그들도 그 시간을 이미 다 떠나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때와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나는 그냥 제자리에 머물고 맴돌고 시간을 붙잡고 싶은 것 뿐인데. 때때로 시간을 되돌릴 수도 멈출 수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오늘이 그랬다. 잠깐 멈추고, 과거의 시간으로 갔다가, 좀 쉬었다가, 돌아오고 싶은 날이다.
하여간에, 이러니 오늘 술을 마셨다고 글을 자제할 수가 있겠느냔 말이야. 술로도 안 달래지면 글이라도 써야지, 안그래? 글에서 술이 느껴지거들랑 쓴 술이라고 생각하면 내 심정과 얼추 맞다. 내일의 시간에는 그깟게 뭐가 그리 가혹하다고 써댔는지 비웃었으면 좋겠다. 솔직히 항상 그랬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보인 줄 아는 바보는 바보일까, 아닐까. 아니면 그냥 헛소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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