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시경의 라디오에 나오는 김혜리 기자의 목소리를 정말 좋아했다. 조곤조곤 말씀하시는데 내용의 해박함은 물론이거니와 매력적인 성격까지 정말 다 좋았다. 7일의 프로그램 중 가장 손꼽아 기다렸고 성시경의 라디오가 끝날 때 김혜리 기자의 목소리를 더이상 들을 수 없는 것이 가장 슬펐다고 하면 성시장님한테 배신일까. 성시장님과의 케미도 좋아했으니 봐줄(?) 것이라 믿는다.
목소리만 먼저 접했던 탓일까. 문제는 내게 김혜리 기자의 글이 너무 낯설다는 것이다. 이동진 평론가의 방송은 정말 좋아하지만 책은 읽어내지를 못하는데, 김혜리 기자의 책이 또 딱 그렇다. 영화를 설명의 도구로 쓰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렵게 느껴지는 영알못인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어쩐지 문학적인(이라기 보다는 구어체에서 잘 쓰지 않는) 표현이 착착 감기지 않는 느낌이 든다. 그것들이 두 분의 신비로움을 한 층 높여주기 때문에 좋기는 한데 근데 읽지는 못하겠어요... 난 신비롭지가 못해...
그런 장벽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기자님의 책에 도전했다. 나도 잘 읽고 싶단 말이야!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주제로 한 책이기에 영화나 인터뷰집보다는 훨씬 잘 읽겠지 하며 발을 들이 밀었다. 하지만 여전히 책은 감기지 않고, 근데 읽고는 싶고.. 이것이 그녀와 나의 수준차이일까 모르겠다.
씨네21의 칼럼을 묶어놓은 이 책은 한 때 미술학도였던 김혜리 기자가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야기를 많이 아는 사람이라서 그럴까. 그림 속에서 이야기를 읽어내는(혹은 이야기를 구성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도 명화 책은 좀 봤는데, 이렇게 앞에서부터 끝까지 모르는 그림이 많은 책은 잘 없는데 말이야. 새로운 그림을 볼 수 있게 해 준 것에 감사드린다.
'리바이어던'에 나오는 '우로보로스'라는 뱀을 본 적 있니? 제 꼬리를 삼켜 하나의 환을 이루는, 홀로 완전한 자.
그는 독인 동시에 치유제이고, 여인이자 사내이고, 지혜이자 정념이야.
끝이 곧 시작이고 시작이 곧 끝이며, 스스로 잉태하고 스스로를 죽이지.
뱀이 되고 싶어. 사랑받지 못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도록.
'정념', 이런거 말이다. 이런 단어 나만 생소한 거니?(어디다 묻니?) 멋지다고 감탄하면서도 절대 쓰지는 못하는 문장이 딱 이런거다. 읽으면 아는 단어지만 쓸 때 생각나지는 않는 말. 뱀을 홀로 완전한 생물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 글을 읽고 나니 뱀이 매력적이란 생각이 든다. 사랑받지 못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도록. 멋지다.
(마르크 샤갈, 1978, '두 개의 얼굴을 가진 화가')
신화 속 야누스는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보기에 두 개의 머리가 필요했다.
아흔한 살의 샤갈은 자기보다 오래 살아남게 될 이젤의 그림과,
후대의 관람객을 동시에 바라보며 헤아릴 수 없는 자문에 빠져 있었으리라.
샤갈의 '나와 마을'이라는 그림을 좋아한다. 샤갈의 최고 작품은 모두 젊은 시절에 나왔고, 저 그림은 이미 쇠잔해진 후라고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이 훨씬 좋다. 김혜리 기자의 해석 때문인지도 모른다. 두 얼굴의 노(老)화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보다 오래 살아남을 나의 무언가가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 무언가가 이미 좋지 못함을 충분히 아는 상태라면 더욱이.
회화도 사진도 영화도 프레임을 숙명으로 짊어지고 있는 한,
예술가의 작업은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이상으로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가를 결단하는 과정임을,
카츠의 그림은 확인시킨다.
비록 바깥이 추하더라도 프레임 안의 것들은 아름답고 기쁘기를 바라는 나는 위선자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적나라하게, 혹은 현실보다 더 잔인한 그림을 보여주며 깨우침을 주고싶을 지도 모르겠다. 프레임 안보다 밖을 보여주는 게 더 나를 잘 표현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예술가는 아니다. 그럼에도 나와 나의 생각과 나의 세계를 우리에게 어떻게 보여주고 보여지고 싶은지 항상 고민하고 있다. 우선 김혜리 기자의 프레임은 아주 좋아한다고 밝혀둔다. 글보다는 말의 프레임을 더 좋아하지만요. 다 닿아 있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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