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소설을 읽을 때, 이 소설이 내가 좋아할 지 어떨 지를 가늠하는 게 아직도 나는 어렵다. 이제 약간이나마 잡은 윤곽이라면 난 일상의 평범함 속에 숨겨진 어디에서 오는지 모를 답답함과 속물을 바라볼 때의 찐적군적한 느낌, 그 사이에서 공허해지거나 찌질해지는 개인을 참기 어려워한다. 내가 굳이 보려하지 않았던 우리 일상의 부조리함을 들춰내는 글들이 거북서러워서라 생각한다. 대신 환상적이거나 희망을 주는 이야기, 유머가 섞인 이야기는 또 좋아한다. 그런 소설들도 리뷰할 때가 오겠지.
그런 면에서 '너무 한낮의 연애'는 읽으며 편안해지는 소설이 아니다. 여러 지면에 발표한 단편들을 엮은 책으로, 읽고 나면 어쩐지 묘했던 등장인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독특했던 부분들이 사실은 그것을 독특하게 만들었던 이 사회가 이상했던 것도 같고, 나와도 좀 닮은 것도 같고. (다음 내용에는 책 내용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민감하신 분들은 피해주세요^-^)
책 첫머리에 가장 먼저 나오는 단편 '너무 한낮의 연애'는 드라마 대본으로 써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역시나 검색해보니 드라마 스페셜로 제작되었다(사람 보는 눈이 다 비슷하지 뭐!). 그 중에서도 가장 클라이막스라고 할 부분은 아래 부분이다.
"모르죠, 그건.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고."
"알 필요가 없다고?"
"지금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는데,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니까요."
필용은 황당했다. 얘가 지금 누굴 놀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한다며?"
"네. 사랑하죠."
"그런데 내일은 어떨지 몰라?"
"네."
"사랑하는 건 맞잖아. 그렇잖아."
"네, 그래요."
"내일은?"
"모르겠어요."
- p.22 『너무 한낮의 연애』
처음 이 구절을 읽을 때는 세상에, 이런 생각 없는 여자애가 있나 싶었다. 아마 이것은 필용의 시각이 내게 반영되었기 때문이리라. 단편을 끝까지 읽고는 양희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재주가 결국 그녀를 만들었구나 했다. 결국 적으면서도 많은 이에게 고요와 힐링을 전해주는 사람이 되었는데, 그것이 실은 모든 것에 초연한 태도를 오랫동안 다져왔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듣던 팟캐스트에서 맞춤한 이야기가 또 나왔다. 가난하고 여유가 없는 상황일수록 장기적인 사고가 어렵고 심지어 일시적으로 IQ가 낮아진다는 것이다. 아 설마, 가정 환경으로 인해 뒤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었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는 태도였던지도 모르겠다. 딸에게 당장 고장난 집의 수리비보다 더 많은 돈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다른데 쓸 곳이 있다고 말하는 아빠... 굳이 내일을 말할 필요가 없다.
근데 또 이렇게 각박하게 해석해야 하나 싶어-양희는 마음에 드는 등장인물이니 역성을 들어주고 싶다!- 차근차근 한 줄씩 저 부분을 읽다보니 어쩐지 나의 이야기 같기도 하다. 나는 내 사랑이 내일도 존재할 것이라 정말로 확신하고 있는지. 애초에 왜 생겨났는지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인데(사랑에 논리가 어디있나~), 그 사실을 양희는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정말 사랑해, 그런데 내일도 그럴 것이라 네게 말하는 건 어쩐지 사탕발림같기도 해. 나는 차마 나의 짝에게 용기내어 이런 말을 할 수 없는데, 양희는 용감한 사람이었나.
단편마다 이렇게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등장인물이 나온다. 구덩이를 파는지 덮는지 모를 세실리아와 그녀 앞에서 지금까지의 삶이 수치스러워지는 나. 조중균, 해란, 그 둘을 바라보는 나. 회사가 해란 대신 나를 선택한 이유를 너무도 잘 알 것 같지만 내가 대체 뭘 아나 싶기도 하다. 낮에는 직능계발을 하고 밤에는 고양이탐정이 되는 나도 있다. 단련되는건 길을 잃은 고양이일까 세상을 홀로 살아가려다 이제 사다리 위로 올라가는 모과장인가. 잃어버린 개를 찾기 위해 집으로 돌아온 나. 고아원이 괜찮은지 어려운지 모르겠는 나.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라도 상한 고기에 대한 컴플레인을 이어가는 나. 이런저런,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은 나, 나, 나. 나를 발견하며 읽다보면 김금희 작가의 눈에 띄는 특장점이 보인다. 그녀는 몇 줄로 이어지는 긴 문장을 아주 리듬감있고 매력적으로 잘 쓴다. 나도 모르게 마치 낭독하는 양 중간중간 숨을 쉬어가며 박자를 타게 되는데, 그 박자의 정점에 있는 문장 하나를 소개한다.
그는 더이상 대꾸하지 않고 사포를 갈았다. 사포삿포삿포포삿포 하면서 그의 손이 합판 위에서 마찰을 일으키면 문득문득 뜨끈한 열기가 느껴졌지만 그때마다 그는 멈추거나 다른 사포로 바꾸어서 사포삿포포삿포포 다시 합판을 갈았다.
- p.236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사포삿포삿포포포! 그가 어떤 식으로 사포를 갈고 있는지 그 손동작과 소리가 선연히 그려진다. 이런 위트와 생동감은 독자가 긴 문장도 무리 없이 읽어내게 하고, 또 의식의 흐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한 논리로 연결되는 것을 따라가게 만들어준다.
큰오빠는 우리 원수이지만 우리 가장이고 우리 가장은 인간 말종이지만 지금은 죽음과 신 앞에 선 가엾은 단독자이며 원수를 갚으려는 전직 샐러리맨이다. 그렇게 몽상하다 멈추고 몽상하고 몽상하다보면 그런 일들이 다 맨숭맨숭해지면서 그냥 그런 보통의 일이 된다. 샐러리맨도 보통이고 마귀도 보통이다. 인간 말종의 원수도 가엾은 단독자도 다 보통의 것, 그냥 심상한 것, 아무렇지 않은 것, 잊으면 그만인 것, 거기서 거기인 것들이다.
- p.222 『보통의 시절』
우리의 삶이나 주변 환경이라는게, 생각하고 생각하다보면 결국 그 존재의 근원적 의미는 찾아낼 수 없고 그저 지나려니 치부할 만한 것들 뿐이다. 정말이지 "맨숭맨숭"하다. 그런데 말이다. 맞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럼 대체 우리는 왜 열심히 살아야 한단 말이야. 허무주의의 결말이 그냥 허무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은데! 맨숭맨숭해져버리면 열정이 꺾인다. 어휴, 이렇게 어항 안 물고기처럼 살아서 그래서 뭐 어쩔까... 그래서 내가 맨숭맨숭을 읽고 나면 찝찌름하고 어딘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이, 언급한 대로 작가 특유의 멋진 문장력과 묘하게 깃든 위트 덕분이었다. 아는 사람을 생각하듯 등장인물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해 보겠지. 어딘가의 회사에서/집에서/병원에서 존재할 나에게, 물고기로써의 동질감을 전한다. 그래도 시간은 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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