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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Book Review] 박완서의 말 (소박한 개인주의자의 인터뷰)

by 푸휴푸퓨 2019.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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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말, 소박한 개인주의자의 인터뷰

 

 

 

  얼마 전 처음으로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를 읽었다. 『헤밍웨이의 말』이었는데, 원래도 인터뷰를 좋아하는 내게 참으로 기분 좋은 책이었다. 인터뷰는 말 자체가 재구성되지 않고(물론 인터뷰어가 정돈을 하였지만) 작가의 입에서 그대로 나온 말이라는 점, 말하던 당시 일관된 분위기와 톤을 통해 그 작가에 대해 더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참 매력적인 글이다.

 

  두 번째로 집어 든 말 시리즈는 『박완서의 말』이다. 나는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않았다. MBC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맞나..?)’라는 예능에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유명해졌을 때 나는 초등학고 6학년이었다. 열심히 읽었지만 6학년이 받아들이기에는 좀 어려웠던 터라 전쟁통의 장면만 조금 기억할 뿐 내용을 아예 모른다. 이후 고등학생 때 두어 권을 더 읽었는데 잔상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다. 결국 내 머릿속 박완서 작가는 교과서에서 배운 ‘그 여자의 집’을 쓴 사람이었다. 그 여자의 집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아니 그 어릴 적 첫사랑의 얼굴을 잊었단 말이야. 젊은 날에 미리 영정사진을 찍는 게 뭐가 어떻다는 걸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달달 외웠다. 첫 작품이 ‘나목’이라는 것도 외웠더랬다. 물론 나목의 내용은 모른다.

 

  박완서의 말을 읽고 나서 교과서에서 그녀의 작품을 대체 배운 소용이 무엇인지 회의감이 들었다. 작품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전체적으로 설명을 듣지도 못했다. 외우기만 하다 보니 재미없다는 생각만 남았다. 그녀는 사실 ‘페미니즘’을 갈구했던 1970~90년대의 여성들이 고마워했던 깨어있는 여자였다. 그녀가 이렇게나 길고 꾸준하게 말한 여성의 삶에 대해 나는 왜 배우지 못했을까. 물론 지금은 그녀의 시대보다 조금 나아졌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틀에서 그녀가 하는 말은 나의 여성주의 생각과 일치한다. 소설가 공지영은 그녀를 인터뷰하면서 박완서가 자연스레 시작한 여성 문제에 대한 언급 덕에 큰 덕을 받았음을 밝힌다.

 

나는 개인적으로 소설가 박완서가 여성 문제에 대한 좋은 글들을 씀으로써 나와 내 동료들을 길러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없었다면 우리는 더 멀고 험한 길을 돌아 왔으리라.

 

  그러나 박완서 작가는 자신이 어떤 주의자가 아님을 분명히 말한다. 추구하는 바가 직접 일상과 소설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을 뿐 그녀가 직접 ‘나는 주장한다!’고 외치지는 않았다. 그녀의 글이 뿜었을 화력을 생각하면 소박한 태도가 놀랍기까지 하다. 영향력을 엄청나게 행사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날 자꾸 페미니즘 쪽으로 몰아가는 것 같은데... 억지로 무슨 주의를 붙이자면 난 그냥 자유민주주의자예요. 개인주의자구, 그냥 소박한 민주주의 개념 있잖습니까? 자기가 이 사회에 필요한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면 항상 떳떳할 필요가 있고, 자기 일을 남에게 존중받고 싶고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것만큼 남에게 대접하는 게 옳고, 남에게 당하기 싫으면 남한테 그러지 않는다든가 하는 아주 기본적인 개념 있잖아요. 평등 개념이라고 할까.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거지만. 어떻게 보면 난 좋은 의미의 개인주의자라고 생각해요. 내가 중하니까 남도 중한거지, 전체를 위해서 나 개인을 희생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런 소박한 민주주의 개념이 남자와 여자 사이라고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정도의 생각밖에 전 없습니다. 여자도 그런 기본적인 인간 대우를 받아야 하고 차별을 받지 않아야 한다 이거지 어떤 굉장한 이론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사회가 싫은 거죠. 남자가 여자를 억압하는 사회도 싫고, 여자가 남자를 억압하는 사회도 싫어요. (중략) 나는 차이는 인정을 해요. 차별받고 싶지 않다는 거죠. 개인에게도 차이가 있는 거고.

 

  차이가 없지는 않지만 그러한 차이로 인해 차별받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 인종차별을 타파할 때의 논리와 전혀 다르지 않은데 왜 우리는 여전히 싸워야 하는지 모르겠다. 박완서의 말은 여러 인터뷰가 묶여 있어서 당시 박완서의 생각뿐 아니라 인터뷰어의 생각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런데, 유난히 어떤 인터뷰는 내 신경을 긁어댔다. 이런 내용이 통용되는 사회였다는 거잖아!

 

Q. 그건 쉽게 파악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여성 작가들의 경우엔 공통적인 현상으로 생각이 됩니다.
A(박완서). 왜 여성 작가인 경우에 그렇다고 하세요? (웃음)

 

  이 인터뷰를 읽으면서 나는 박완서 작가도 인터뷰 내내 편안하지는 않았으리라 느꼈다. 두 명의 인터뷰어가 진행한 인터뷰인데 어쩜 둘 다 그렇게 껄끄러운지, 기분이 점점 상해가던 차에 저 부분을 읽고 기함을 했다. 당시 사회적으로 최상급이라 인정받는 소설가였던 박완서 작가 앞에서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작가는 그것을 웃어넘겨야 하는 사회였다면(저 웃음이 어떠한 톤의 웃음인지는 내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체 그 시절은 어떤 시절이란 말인가.

 

참 이상한 일이에요. 현대사회 속에서 다른 유형의 윤리나 관습 등은 단시간 내에 붕괴하는데 유독 가족 윤리만은 그 변화나 붕괴의 속도가 매우 더딥니다. 우리 사회 속에 아직도 존재하며 기존 가족 윤리의 붕괴를 경고하는 사람들이 소위 유림들이죠. 이들의 주장이 여태껏 유효하다는 게 그것을 입증하지요. 그러니 가족 사회 속에서의 남녀 관계는 마치 정치권 속에서의 여야 관계 같은가 봅니다. 남성들은 분명 기득권자이면서 여성 상위니 경제권을 빼앗겼느니 하는 말들로 여성들을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마음 밑바닥을 들여다보자면, 실제의 권한만은 조금도 내놓고 싶지 않은 게 사실이지요.

 

  가족 윤리의 붕괴를 이야기하는 것조차 우스워진 지금도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유림이 산다. 지금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 시절의 작가도 하고 있다. 다만 모든 문제가 한쪽의 탓이 아님을 현명한 그녀가 모를 리는 없어서, 그런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박완서 작가는 남자만의 태도를 지적하지는 않는다. 그녀가 언급한 이야기 중 두 가지 측면이 기억에 남는다.

 

저는 언젠가 프로이트의 책을 보면서 저 사람 분명 서양 사람인데 어떻게 우리와 동일한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프로이트의 주장에 따르자면, 어머니들은 아들을 낳자마자 자신에게 없었던 남성의 성기를 자신이 달게 되었다고 느낀다는 것이죠. 그동안 남성의 성기가 없어서 갖은 억울함을 당해 왔는데, 자신의 몸에서 아들을 낳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곧 그 아들의 성기를 달게 되었다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무력했던 한 며느리가 아들을 낳게 되면 당당해지고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고부갈등이 여전히 문제가 되는 시대다. 지금 나의 연인은 남자 형제뿐이라 집안의 여성은 엄마 한 명이고, 그래서 그의 여자 준거점은 당연히 엄마이다. 나는 종종 아들만 키운 엄마와 딸만 키운 엄마의 차이점에 대해 생각한다. 또 그의 엄마와 나의 생각이 다를 수 있음을 어떻게 하면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을 지에 대해 고민한다. 혹여나 언젠가 결혼 이야기라도 나오게 되면 어쩔까. 나는 그의 엄마가 겪은 시집살이가 우리 엄마만큼이나 고되었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가 내 위로 군림하는 태도를 참을 수 없을게 뻔하다. 그녀가 공정하다거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가족 윤리에 반기를 들 지도 모른다.

 

(소설 서 있는 여자의 결론에서, 이상적인 새로운 부부상의 완성 대신 망가진 커플의 결론인 것을 보고 실망을 한 인터뷰어가 그 소설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하고 질문한다) “말로써 쉽게 남녀평등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젊은 여자들, 만만한 남자를 만나서 평등을 쉽게 이루려는 약은 여자들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을 보여주고자 했다

 

  인터뷰어는 자신이 약은 여자라 생각해 정곡을 맞은 듯했단다. 어쩌지, 이 내용을 보고 나도 정곡을 맞았다. 아직도 남근의 세계에 갇힌 남자들은 도태되라지. 나는 깨어 있는 남자와 행복하게 살 거야. 함께 노력해야지! 아. 나의 편리한 마음을 찔러주는 그녀에게 역시나 그녀가 맞다고 말하고 싶다. 사회 전체가 변해야 하는 일인데 너무 아득해서 모른 척하고 싶었어요.

 

  당시로서는 특별하게도 남녀차별을 하지 않는 어머니 밑에서 공부했고, 서울대에 진학했으며, 편안한 결혼생활까지 일궜던 박완서 작가에게는 중산층이라는 지적이 항상 따라다닌다. 그녀도 약점을 완전히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고백하는 모습이 오히려 멋지다. 약점을 수긍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 질문은 제 약점을 건드린 거예요. 제가 중산층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에는 언제나 승복합니다. 그렇지만 작가가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인데, 그쪽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실감으로 와닿지가 않아요. 그래서 현장 취재도 해보았지만, 체험을 바탕으로 한 취재가 아니라서 그런지 작품이 잘 안써져요. 그러나 제가 중산층적 한계를 지녔다고 사람들이 매도할 때에는 좀 듣기 싫어요. 가장 잘 아는 것밖에 쓸 수 없는 것이고, 제게 있어서 소설이란 뭔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저리고 아프면서 끓어오를 때 써지니 참 곤란하고 어렵네요.

 

  그럼에도 그녀는 편안히 살아오지 않았다. 개성에서 태어나 공부를 하고 제2차 세계대전과 6.25를 겪고 근현대사를 뚫고 지나온 박완서 작가는 자신이 한 500년쯤 산 기분이라고 여러 차례 밝힌다. 개성에서 태어나 개성에서 평생을 산 자신의 할머니와 비교하면 어쩐지 1000년을 산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그 시대의 사람들이 다 그렇게 느끼리라 짐작해 본다.

 

  어쩌면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이 박완서 작가의 여성주의적 소설의 맥을 이은 것일지도 모른다. 흠, 김지영이 좀 더 급진적인가? 그 소설을 읽고 너무나 현실적이라 오히려 재미가 없다고 느꼈다. 그런데 비현실적이라고, 과장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보고 진심으로 놀랐다. 너무 평범해서 지루하다고까지 생각했는데! 나의 평범과 사회 시선의 간극이 그렇게나 크다는 게 오히려 비현실적인 기분이었다. 아니 우리 사회.. 아직 그 정도라고...? 이에 더해 "90년대에는 멋진 언니들 없었을 것 같아?"라는 말은 나의 뒤통수를 때렸다. 처음에는 그러게, 없었을 리는 없는데 나아진 정도가 요만큼이라니 그럼 지금의 사회 현상도 도돌이표가 되는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멋진 작가 제현주 작가가 '일하는 마음(2019/03/22 [Book Review] 일하는 마음 - 제현주)'에서 그려둔 그림을 발견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맞아. 우리는 나선형으로 성장하고 있다.

 

 

 

 

  비단 페미니즘뿐만이 아니다. 모든 일은 제자리를 반복하고 있어 보여도 사실은 발전하고 있다. 그때는 '여성 작가들은 대개 그렇더군요'라는 말이 지면에 인쇄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감히 그런 말을 인터뷰이한테 말할 수 없을 테다. 그러니 어쩌겠어. 바뀐 게 없는 건 아니야. 희망을 버릴 수가 없다.

 

  박완서 작가에 대해 몰랐던 부분을 엄청나게 많이 보여준 책이었다. 그녀를 내 마음처럼 정리한 인터뷰어의 말이 있어 그것으로 끝을 맺고자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정리를 말한 사람도 남자다. 그러니까, 전체 중에는 이런 개인 저런 개인이 많이 있다니까. 힘내서 앞으로 가자고!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제기되기 전에 선생님은 작품에서 실천하고 계셨던 셈인데, 저는 선생님의 여성적 시각을 문화주의적 여성주의라고 비평적으로 명명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여성적 가치나 이데올로기를 거칠게 내세운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제도와 생활방식의 틀 안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고, 그런 측면에 대한 관심이 아주 세심하게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제기되기 전 단계, 즉 생활과 같이 호흡을 하는 특이한 여성적 관점들이 일찌감치 의미를 발효하고 있다고 봅니다.(권영민)

 

박완서의 말
국내도서
저자 : 박완서
출판 : 마음산책 2018.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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