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현주'라는 분을 처음 알게 된 건 금정연 서평가 덕분이었다(어쩌다 그 분의 글을 찾아 읽기 시작했는지는 오히려 기억나지 않지만). 금정연 서평가가 일상기술연구소라는 팟캐스트를 하는데 그 내용이 책으로도 나왔다는거다. '일상기술연구소'라니, 연구소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책을 샀다. 당연히 책도 마음에 들었고(이것도 언젠가 리뷰하겠거니!) 팟캐스트도 모든 회차를 다 들었다. 일상기술연구소가 시즌 1이 끝나 너무나 아쉽던 차에 이 책이 나왔다. 심지어 내가 애정하는 출판사인 '어크로스'에서 나왔다고! 더할 나위 없었다. 최대한 빨리 읽었다.
역시나! 아니나 다를까! 책이 너무 좋다. 너무 좋아서 여러 지인들에게 추천해 봤는데 다들 꺆꺆거리고 읽는다. 이 책을 추천한 사람들이 전부 20대 후반의 일하는 여성이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을 정확히 긁어준다. 한 발 먼저 나가서는 좋은 길도 터주고 있다. 그리고는 하나의 희망이 될지도 모르겠다며 겸손하게 말한다. 저자는 이런 선배가 우리 회사에 있다면 롤모델로 삼고 끝없이 따르고 싶은 탄탄한 커리어우먼이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직업을 가진 여성으로써 이런 정도의 생각과 글을 하고 살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성공이겠다.
모든 삶에는 빠진 구석이 있고, 또 그 덕에 채워진 구석이 있다. 모든 삶에는 부러운 점이 있지만 나름의 어려운 점도 있다. 다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붙들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버리거나 견뎌야 한다. 내가 이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았다 해도, 크게 다른 삶을 살았을 것 같지는 않다. 결국 나라는 사람은, 모두가 그렇듯, 이런 식으로 생겨 먹어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비슷한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선택들에 그토록 조바심을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나온 시간에 조금쯤 애잔한 마음이 드는 이유다.
지금까지의 내 선택을 후회하지 말자. 때로 남을 기웃거리며 이 사람은 이래서 부럽고 저 사람은 그래서 부럽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누군가는 나를 보며 부럽다 생각할 지 모르는데 말이다. 그런데 어느날 생각이 바뀌었다. 지난 시간이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고 말할 순 없다. 그래도 그 나름의 최선이었다. 나의 삶이고, 그게 나고, 그런 나에 자부심을 가지면서 계속 살아갈거라고. 그런데 같은 이야기를 저자가 해 주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우리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게 맞다.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 나만 알고 있어도 충분한, 자기완결적 우주가 여기에 있다. (중략) 나는 애호하는 사람들에게만 열리는 겹겹의 우주가 있다는 걸 '안다.' 믿는 것이 아니라 안다. 그리고 나의 그 우주 안에서 깊은 안정감을 느낀다.
오늘 스키는 이것으로 충분하고, 내 삶은 이런 즐거움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세상 쓸모없(어도 되)는 이 일 때문에 나에게 부과되는 모든 쓸모 있(어야 하)는 일들의 무게가 별것 아니게 느껴지는 순간. 내 일상 속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순간이다.
이 구절을 읽고 나는 이 책이 정말 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훌륭하다고 느꼈다. 작가의 안온한 우주가 스키라면, 나도 나만의 안온한 우주가 있다. 우주를 키워내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였다. 때로는 빛이 나지 않는(생산성이 없는) 부분에 이렇게나 시간을 쏟나 싶었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그 시간들은 내 마음 곳곳에 산재되어 더 넓고 깊은 나를 만들어주었다. 그런 나의 노력을 타인이 눈치채지 못해도 괜찮을 만큼 나를 편하게 해주는 세계. 느끼고는 있었지만 저자의 말로 한 번 더 정리가 된다.
20대 후반의 여자 후배 하나가 "어떻게 하면 오래 일할 수 있느냐. 특별한 기술이 없어서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라고 했고, 거기에 "그냥 꾸역꾸역 하면 된다"라고 답했다는 거였다. "하다 보면 치사하고 더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거야.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고. 그럴 때 깊이 생각하지 말고 그냥 꾸역꾸역 하면 돼." (중략)
계속 하는 것과 열심히 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문제다. 계속 하다 보면(언제나 열심히는 아니더라도) 그것만으로 이르게 되는 어떤 경지가 있다.
올해 부쩍 주변에 결혼하는 이가 많아졌다. 결혼은 자연스레 임신을 떠올리게 한다. 임신에 자신이 있거나 빨리 하고 싶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이 비교적 자유로운 곳이지만 그럼에도 승진에서도 입지적으로도 밀리게 된다. 자리에 없는데 당연하겠지. 점점 직업과 가정을 모두 잘 키워갈 수 있을지 걱정하게 된다. 특별한 기술이 있어 나를 아무도 대체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일을 아예 그만두고 싶다는 친구도 많다.
작가는 아이가 없지만 아이가 있어도 계속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도 전해준다. 아이가 있건 없건, 일이 재미있건 더럽건 꾸역꾸역 버텨보자. 잘 하는 것만큼이나 오래 하는 것도 중요하다. 나는 아이를 낳으면 지금보다 더 일을 꾸역꾸역 하리란 부정적인 예감을 느낀다(사실이 될 지 알 수 없다). 그치만 그렇게 해도 괜찮아. 나름의 의미가 있다. 혹시나 어쩌면 더 신이나서 할 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지금 아주 잘 하고 있다고 자신하기는 어려운데, 그럼에도 나아가야 하는 이유다.
조직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와 별개로, 자기만의 만족 기준, 달성하려는 목표를 가진 사람이 탁월성을 만들어낸다. 탁월성은 또한 자신이 해온 일, 하고 있는 일을 어떻게 반추하며 자신만의 시각으로 해석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중략) 그런 사람이 만들어내는 탁월성은 전문성으로 치환되지 않더라도 굳건한 디딤돌이 되어준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일해야할까. 큰 틀에서 나는 조직의 나사처럼 일하고 있지만, 지나가는 아무라도 대체할 수 있는 평범한 나사이기는 원치 않는다. 이때 저자가 제안하는 방향은 '탁월성'이다. 탁월성은 내 일을 나만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단순반복적인 일을 하지 않는 이상 일에는 담당자의 생각이 반드시 들어간다. 마침 요즘 내 생각을 더 많이 드러낼 수 있는 일을 맡았다. 내가 어떻게 기획할지, 해석할지, 표현할지에 따라 많은 부분이 바뀐다. 처음은 미약하더라도 뒤돌아보았을 때 점점 성장했음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성장이 내 디딤돌이 되겠다.
어린 나이에 만난 우리는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 모냈다. 같은 곳을 수없이 함께 갔고, 같은 풍경 아래 함께 섣거나 서 있었지만, 경험은 같지 않았을 것이다. (중략) 두 명은 정말 다른 사람이고, 그래서 거기엔 서로 다른 두 개의 경험이 있다. 나는 이렇게 다른 우리 둘이 같은 언어로 말을 하고 함께 중요한 결정을 내리며 세월을 쌓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또 '생각한다.'
책의 마지막은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타인과 어떻게 연대하고 협업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시작은 남편이지만 비단 같은 장소에서 다른 생각을 하는 건 남편뿐만이 아니다. 다름에도 우리는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함께하자는 마음을 공유하는 일은 작가의 말마따나 경이롭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향과 당신의 이상향이 겹쳐서 힘을 합치자 마음 먹는 것. 때로는 서로의 존재만으로 큰 위안이 되는 것. 아마 오래도록 이 회사에 다닐 내가 다른 이들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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