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현주 작가가 좋다고 그렇게 써 뒀으니, 쓰신 책을 또 읽는 건 당연한 수순 아니겠어요? 어떻게 일하며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젊은이로써 흥미가 동하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2019년에 신판이 나왔다(음, 난 구판의 표지가 더 예ㅃ....읍읍 요즘은 사진보단 그런 느낌이 더 유행인가보지 뭐). 이런 책을 썼던 분이니 '일하는 마음'까지 집필 할 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그런, 책이었다. 고수 중에서도 고수라니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기 위해 정말이지 노력했다. 아직 완성형이 되지는 못했지만(완성형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래도 과거보다는 나아졌다. 이 길을 정말 걸어가야하는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던 시절, 어디선가 말을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건 100% 매일 좋은 일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란다. 좋아하는 일은 싫어하는 업무 99%에 좋아하는 부분 1%가 섞인 일이라고. 혹여나 좋아하는 부분이 10%쯤 된다면 그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랬다.
이 말을 듣고 내가 왜 선택한 직업을 지속해야하는지 깨달았다. 나는 1%보다는 훨씬 많은 부분을 좋아해. 그래서 난 내가 견딜 수 없는 부분을 없애자는 결심을 했다. 나를 미치게 만드는 요소 몇 가지를 꼽았고 그것만은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운이 따라주어 차근차근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발버둥쳐야 하지만 지금의 이 자리는 상당히 좋아한다. 저자도 우리가 일을 싫어하는 마음을 좀 더 세밀하게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니까 실마리는, 좋아하는 부분이 아니라 싫어하는 부분에 있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이 입버릇처럼 '일하기 싫다'고 말하지만 싫은 것은 대개 일 자체라기보다 일이 놓인 조건이다. 그저 싫다, 괴롭다 토로하는 대신 정확히 어떤 부분이 싫은지 구체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거기서부터 무엇이든 하나씩 지금과는 '다르게' 해보아야 비로소 실마리가 드러난다.
회사에 가면 집에서나 친구 사이에서의 나와는 전혀 다른 내가 나왔다. 처음에는 내 모습이 괴로웠다. 주말 내내 집에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울적하던 내가 월요일 회사에만 출근하면 생긋거리며 웃었다. 스위치가 딸깍, 켜지듯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바뀌는 내 모습이 의아하기까지 했는데 이게 그저 가식이 아닌 성숙함이라 말해주는 것에 뒤늦게 큰 위로가 된다. 요즘도 회사 동기는 친구인가 동료인가의 문제로 종종 고민을 하는데, 그 간극이 진정성의 부재가 아니랜다. 정말 나도 양쪽 다 진심이예요.
은폐의 가면이 반드시 자기방어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예의범절과 책략은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감정을 가려주는 행동이다.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고 상황에 따라 적절한 연극을 할 줄 아는 것은 사회적 인간의 미덕이기도 하고 어른이 되어간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한다고 해서 진정성을 내팽개치는 것도 아니다. 성숙한 진정성은 자신의 성격이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하고 있는 일의 목표와 가치를 스스로 얼마나 믿고 있느냐로 진정성은 판가름 난다.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 아빠는 내게 직장에 우리가 파는 게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했다. 우리는 시간을 팔고 있다고, 시간이 그래서 제일 귀중한 거랬다. 이 말을 들은 후부터 나는 야근이 너무나도 싫었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에만 야근을 할 수 있도록 정말 최선을 다했다. (내 생각에) 의미없는 야근을 하지 않기 위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눈길을 외면하던 고충의 나날들도 그나마 매일 야근을 견디는 이들보다는 나은 사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자는 이 생각에 한걸음 나아간다. 우리는 단지 시간을 판 게 아니라 '통제력'을 넘겨주었다.
회사에 앉아서도 이른바 '딴짓'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여유를 즐겼다. 그렇지만 그 상태로 시간이 조금 흐르자 오히려 통제력을 잃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략) 그 순간 나는 내 일의 대가를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 시간을 판 대가, 즉 내 자유의 일정 부분을 포기한 대가를 받는 사람이었다. 그 둘은 스스로 내 일상을 통제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였다.
제어할 수 없는 시간 앞에 나는 더욱 수동적 객체가 되어 무력감을 느낀다. 그 감정은 단순히 바쁜 상태보다도 더 참을 수 없는 부분이 된다. 회사에 매여있는 시간만큼 나는 내 미래를 생각할 시간을 빼앗긴다. 때로 분노를 느꼈던 건, 나와 내가 아끼는 사람들은 회사에서 그렇게 젊음을 다 빼앗기고 있다고 느끼는데 그게 생각보다 유용하지 않다는 기분을 느낄 때였다. 우리는 끝없이 자기계발을 이야기한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자, 자격증을 따자, 공부를 하자.. 왜 낮의 노력은 무용하고, 밤까지 노력해야 하는가. 언제까지 성장해야 하는지 괴로운 나날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현재이기도 하고.
개미는 그 자리의 최선을 다해내면서 언젠가는 이 자리를 박차고 날아오를 가능성까지 지닌 자여야 한다. 모든 개미는 베짱이의 준비 단계일 때만 그나마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다. (중략) 지금 통과하는 개미의 일상은 언젠가 돌이켜 추억할 에피소드여야 한다. 개미가 하루하루 뚫고 지나야 하는 심리적 전쟁이란 이런 것이다.
동의하지 못하는 전쟁에 사랑하는 사람을 내몰면서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도 답을 찾을 수 없어 그냥 외면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질문을 계속 한다. 네가 좋아하는 건 뭐야? 나는 세상이 좋다고 생각하는 일보다 네가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 그게 상대에게 더 행복을 주리라는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저자 덕분에 한 마디로 정리한다. 나는 당신이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길 바란다.
자존감이 "세상에서 자신을 스스로 지탱할 수 있다는 확신"이라면 자존심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싶다는, 그래서 그들에게 높이 평가받고 싶다는 욕망"이다. 자존심은 베버가 말하는 노동 윤리의 핵심이며, 능력주의가 불러일으키는 욕망이다. 자존심부다는 자존감으로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는 사람만이 '관객'으로보터 자유롭게, 오히려 진짜 '자기 주도적으로' 일의 기쁨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럼에도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다. 이 안내서를 읽어도 당장 무언가 바꾸기는 어렵다. 저자가 제시하는 결론도 역시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결국 지금의 일터에서 우리는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새로운 일터에서 일해야 한다. 서로 사람이라 여겨주는 동료가 있는 직장. 요즘 좀 더 역동적이고 새로운 직업/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지만 선뜻 내가 그리 할 수 있다는 용기가 나지 않는다. 변화는 역시 쉽지 않다.
어떤 사람이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면 기업의 평가 시스템으로 점수 매겨지는 '능력'때문일 수는 없다. 대체 불가능성은 능력의 양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가 만들어내는 질적 차이에서 나온다. 그런 대체 불가능성이 현실에서 효력을 발휘하려면 그 차이를 발견해주는 조직이, 즉 사람'들'이 필요하다. (중략)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려면 등가성을 따지지 않고 내 존재의 의미를 발견해주는 일터에서 일해야 한다.
어떻게 살건 일하고 살아야 하는 우리는 '유능'이라는 목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까 나는 유능을 계속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을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일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사는데 쉬운 부분은 하나도 없다. 늘 깨닫는다.
그리하여 다르게 살고자 한다면 결국 더 유능해야 한다. 이것이 흔한 자기 계발서의 주문과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다만 유능의 준거가 세상의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유능해야 할 이유가 온전히 나의 것이어야 한다. '남들만큼'이 아니라 '나름대로' 먹고살며, 시장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귀 기울이면서 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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