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희일비의 아이콘
회사 일에 지쳐 흑화한 나를 보고 사람들이 흑ㅇㅇ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만 흥분해서 말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머어머 흑ㅇㅇ이다 흑ㅇㅇ’이란 이야기를 듣는다. 제 생각보다 더 정신이 나가 있나요? 나는 요즘 내가 어떻게 보이는 지도 잘 모르겠다.
점심시간에 산책 삼아 문구점에 갔다. 요즘 젊은이는 가방에 봉제인형을 달고 다닌다면서요? 지하철에서 많은 이를 부러워했으나 마음에 쏙 들어오는 친구도 없고 칙칙한 몰골에 인형만 귀여운가 싶어 주저한지 오래였다. 그런데 운명같이 제 친구를 발견했지 뭐예요. 새까만 날개에 하얀 배, 맑눈광 눈을 가진 핑구가 봇짐을 들고 막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뭐야, 맨날 무채색만 돌려 입으며 사무실을 뜨고 싶은 내가 왜 여기에!
결정을 지지리도 못 내리는 상사와 회의를 했다. 이번에는 꼭 결정해주어야 하는데, 어찌나 걱정했는지 방광염이 재발할 정도였다(경험치가 있는 늙은이는 주저하지 않고 병원에 가 항생제를 받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무엇에 기분이 좋았는지 모르겠지만 상사가 평소와 다르게 안건을 통과시켜 주었다. 어리둥절한 와중에도 기세를 이어가려 혹시 이것도, 이것도 하며 쌓아뒀던 안건을 하나씩 꺼냈다. 다 결정해 주신다굽쇼? 이게 무슨일입니까요?
맑눈광 핑구와 그나마 뭐가 되었던 회의 덕에 흑ㅇㅇ에서 회ㅇㅇ로 조금 옅은 사람이 되었다. 핑구야 고마워. 빨리 모든 일이 끝나 백ㅇㅇ이 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때까지 핑구친구는 대롱대롱 함께 다니는 걸로 해!
p.s. 그리고 이어진 다음주 회의에서 그는 또다시 그답게 모든 걸 거부하여 나를 다시 흑흑흑빛으로 만들었다는 사실. 사람은 변하지 않지, 암.
2. 언니네 집 정리하기
언니가 서울로 이사를 왔다. 2년의 짧은 기간이 아쉽지만 가까이 사는 기회는 귀하다. 정리는 못/안하는 맥시멀리스트 부부를 위해 주말에 정리맨으로 출격했다. 정리된 집에 가서 구경이나 할랬는데, 진도가 안나가는 모습을 보고 도와주지 않을 수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기겁하는 반응이 절로 나왔다. 이게.. 다.. 뭐야..? 온 바닥에 짐이 깔려있고 모든 수납장엔 엉망진창으로 물건이 우걱우걱 들어가 있고.. 식탁은 밥 먹는 부분만 빠꼼한데 그나마도 정리된 거라며 언니가 웃었다. 엄마는 금요일에 와서 부엌 선반 하나 정리하구 갔어~ 선반이고 선반 할아버지고 이런 집에서 잠이 오는지 신기했다.
언니가 올라가기 위험한 부엌 상부장부터 시작했다. 의외로 쓰지 않는 그릇은 쿨하게 처분하라는 형부의 의견 덕에 자리가 비어 흩어져 있던 물건을 모았다. 내가 그릇과 씨름하는 동안 형부는 커피를 내려준다며 커피머신과 씨름했다. 내가 가져간 원두에 잘 맞는 굵기와 시간과 무게가 어쩌구.. 이 혼돈의 카오스에서도 커피의 굵기가 중요하구만. 이 집에 요리용 저울과 커피용 저울이 따로 있어 놀라는 건 나뿐이었다. 당장 쓰지 않는 여분의 공산품은 박스 하나에 모아두고, 예쁜 밥솥이며 자주 쓰는 그릇은 손 잘 닿는 곳에 놓았다. 식세기 세제는 식세기 근처에 있어야지. 엄마가 정리해뒀던 선반도 자주 손이 갈 순서대로 위치를 바꿨다. 방 안의 전자렌지장까지 정리해주고 나니 이제 전자렌지장에 있던 제빙기와 함께 베란다로 갈 차례.
제빙기는 당근을 하려는데 여름에 잘 팔릴거란 이야기가 납득이 갔다. 코스트코에서 장을 보는 이 부부는 커다란 휴지가 세 덩어리나 있었다(보일러장에 쌓아줬다). 가정집에서 누가 그릴에 고기 구워먹어요?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캠핑을 가야한다는 욕망을 자극하니까 조용히 하라고 지적받았다. 그릴 판에 청소도구에 숯에 뭔 부속품도 참으로 많았다. 베란다에 방치된 공기청정기를 집 안으로 옮기고 바닥에 널부러진 친구들(예: 해변에서나 태울 것 같은 불꽃놀이 막대기)도 치웠다. 피곤하다는 임산부에게 가만히 앉아 종이봉투 손잡이나 분리수거 하라고 던져주었다(김종국은 봉투아저씨, 이 부부는 봉투부부). 화장실 여분 청소용품과 선풍기, 프리다이빙 장비(그렇다 이 부부는 필리핀에 다녀와서 프리다이빙도 배웠다), 온갖 물품을 정리했다. 치우니까 또 치워지는 게 신기했다.
현관 앞 탁자 위도 장식하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운동방도 치웠다(가정집에 매트 두 개, 폼롤러 세 개, 팔굽혀펴기 보조기구, 복근운동기구, 매달리는 봉, 사이즈별 탄력밴드, 사이클, 서클링, 무게별 덤벨 등등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시켜달라는 형부에게는 시스템행거를 조립하는 임무를 줬다. 쉬지않고 움직이는 나에게 언니는 자꾸 누우라고 -일단 본인이 소파에 누워서- 권유했다. 지금이 누울 때냐고! 뒷베란다도 치워내고 분리수거통을 세팅했다. 부부가 각각 워터픽을 쓰는 혼돈의 화장실에는 압축봉을 달아 청소도구를 매달았다. 화장실에 수납장이 없다고 언니는 불만이었지만 우리 집보다 많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압축봉은 약하니까 가벼운 플라스틱만 걸어야 돼, 다짐만 해주고.
오후 세시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쉬지 않고 치우고 있을 내 모습이 뻔해서 그만 쉬라고 전화하셨다지 뭐야. 맞는 말이었다. 엄마는 이삿짐센터 사람들도 너무한다며, 오만데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가서 화가 난다고 했다. 엄마도 이해가 가고 던져놓고 간 업체도 이해가 갔다. 물건이 너어어어무 많잖아요? 이 부부는 무얼 어디에 둘지 제대로 된 방향을 설정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정리 미련이 뚝뚝 떨어졌지만 언니네도 너도 내가 이제 그만하기를 원해서 강제로 정리를 멈췄다. 네가 일산에서 무려 포폴로피자를 포장해와서 돈까스와 함께 신나게 먹었다(가져갔던 가리비 파스타 재료는 그냥 언니네 집 냉동실에 헌납했다). 보드게임(사무라이!)도 하고 산책도 했다. 언니가 3주에 걸쳐 천천히 하려던 정리를 꽤나 많이 해냈다고 좋아해서 나는 기함을 했다(이 지경으로 3주를!). 안방을 전혀 손대지 못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내가 몬스터렉을 주문하라고 강요해서 언니와 형부가 옹기종기 주문을 진행했다. 도착해서 조금만 더 치우면 그래도 볼만한 집이 될 것 같아 안심했다.
정리하는 영상을 찍었다면 제법 조회수가 잘 나오는 유튜바가 되었을 텐데. 그 아수라장에서 이사 브이로그를 찍는 사람은 대단하다. 집에 오고 난 뒤 힘들어서 다시는 놀러 안온다고 하면 어쩌냐는 형부의 걱정을 전해 들었다. 걱정 마십쇼. 다음에는 같이 코스트코에서 장을 보고 소분하는 시간을 가지러 방문하도록 하겠읍니다(feat. 형부의 회원권). 코스트코 아 조만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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