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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Book Review]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by 푸휴푸퓨 2016.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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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서는 1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추천합니다. 어둠의 저편을 읽었는데 이게 뭔가 싶었지만 모두가 좋다고 하는 것 같아 참고 1Q84를 읽었는데 또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해제 책을 읽었음에도 이해할 수가 없기에 그 이후에는 하루키를 읽으려고 시도하지 않았어요. 네, 저는 하루키 소설이랑 잘 맞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좋아요.


  여기까지가 자기고백. 하루키 싫어!라고 외치고 다녔지만 이 책은 참 재미나게 읽어서 다시 한 번 하루키의 소설을 시도해봐야 하나 싶다.  노르웨이의 숲이나 해변의 카프카나 시도를 하기는 해야 하는가! 오랜시간 어느 한 직업에서 인정받는 이라면 그 사람의 직업관은 '항상' 들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 세계적으로 공감받는 하루키의 말이라면 더욱 그러하겠지. 그가 소설가라는 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정말 궁금했다.



애초에 소설 같은 건 쓰지 않아도(혹은 오히려 쓰지 않는 편이)

인생은 얼마든지 총명하게, 유효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쓰고 싶다,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 라는 사람이 소설을 씁니다.

그리고 또한 지속적으로 소설을 씁니다.

그런 사람을 나는 물론 한 사람의 작가로서 당연히 마음을 활짝 열고 환영합니다.


링에, 어서 오십시오.



  하루키는 일본 문단의 주류와는 별 인연이 없는 사람인가보다. 아쿠 어쩌구 상(은 나도 잘 모르니 상관 없긴 하지)을 타지 못한게 그에겐 꽤나 오래 따라다녔나보지?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데 긴 지면을 할애하지만 그 생각마저도 읽기가 나쁘지 않다. 그리고서 새로운 작가들을 환영해준다. 쓰지 않는 편이 더 좋지만, 소설을 쓰는 이는 빨리 결단을 내리고 생각하기보다는 천천히 생각해야만 하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소설을 쓴다면 환영합니다. 어서오세요. 어서 오라고 말하는 마음이 좋다. 어쩐지 문화계 원로께서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온화한 얼굴로 자택(혹은 자택 내의 서재?)의 문을 열어주는 이미지가 생각난다. 어서와요. 젊은이들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자신만의 오리지널 문체나 화법을 발견하는 데는

우선 출발점으로서 '나에게 무엇을 플러스해간다'는 것보다

히려 '나에게서 무언가를 마이너스 해간다'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너무도 많은 것들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정보 과다라고 할까 짐이 너무 많다고 할까,

주어진 세세한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자기표현을 좀 해보려고 하면

그런 콘텐츠들이 자꾸 충돌을 일으키고 때로는 엔진의 작동 정지 같은 상태에 빠집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만일 당신이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가 와 닿는 것은 비단 소설만이 아니라 결국 나를 표현한다는 모든 행위에 있어 나에게 무언가를 더해 포장하기 보다는 담백하게 드러내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깔끔하고 정갈한 이에게 끌리는 것은 누구나 그러하지 않을까. 그런데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떠올리기가 쉽지가 않다. 생각에 잠기게 하는 단락이었다. 



만일 당신이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면 주위를 주의 깊게 둘러보십시오-라는 것이 이번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세계는 따분하고 시시한 듯 보이면서도 실로 수많은 매력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원석이 가득합니다.



  결국 세상은 관찰해내는 자가 승리하는거야! 박웅현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삶을 살 때 '촉수'를 항상 세우고 있어야 한다. 인문은 그 촉수가 건강하도록 도와주는 것들로써 더 나아가면 우리 삶을 풍요롭게도 해준다. 소설가에게는 그 촉수가 소재를 잡아내는 더듬이란 뜻이구나. 결국 깊은 통찰은 소설이나 인문이나 관계 없이, 모든 부분에서 서로 통하는 것이겠다.



소설을 쓰려면 무엇이 어찌 됐든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라는 애기와 동일한 의미에서,

인간을 묘사하려면 사람을 많이 알아야 한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촉수의 한 부분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말고. 나는 성선설을 믿는다. 그 믿음이 흔들릴 때도 있지만 아직 그래도 나는 사람을 믿는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결국 다른 이의 인생이 궁금하기 때문이고, 그렇다면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하는 것도 결국 자명한 일이고, 종래에 내가 더 예민해 질 것도 당연한 일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는 데릭 하트필드라는 가공의 작가가 등장하는데,그

가 쓴 작품 중에 '기분 좋다는 게 뭐가 나빠?What's wrong about felling good?'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습니다.

정말로 그게 당시 내 머릿속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던 사고방식입니다.

기분 좋다는 게 뭐가 나빠?



  '좋으려고 사는 거고 재밌으려고 하는 거야'라는 말을 나는 항상 하고 다니고 있고 심지어 면접의 자기소개에서도 빼놓지 않는다(그래서 떨어지는지도 모르지!). 지금도 그게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내가 즐거워야 세상이 즐겁지! 하지만 그런 얕은 쾌락주의는 나이가 들면 나조차도 납득하기에 좋은 이유가 되지 못할거라는 사실은 나도 자각하고 있었다. 뭐가 나쁘냐면, 책임감이 좀 없는 것도 같거든. 여기까지가 내가 생각해 낸 수준이었는데 그럼에도 지금까지 모든 생각을 이겨내는 건 '지금 당장 살기가 힘든데 좀 재미있으면 안돼?'라는 말이었다. 대안을 생각해내기가 귀찮아 제쳐둔 것이다. 



그런 자세가 서서히 변화를 보였던 것은 '양을 둘러싼 모험'(1982)을 쓰기 시작할 무렵부터입니다.

지금은 이런 소설 스타일을 '참신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좋아해주는 독자라도

계속 똑같은 것만 읽다 보면 나중에는 지겨워 하겠지요.

물론 글을 쓰는 나 자신도 지겨워집니다.


쓰면서 나 자신이 기분 좋고, 동시에 정면 돌파적인 힘을 가진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내 해답을 하루키가 말해줬어요!는 아니지만 하루키는 소설론을 통해 결국 정면 돌파를 하기는 해야한다고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어떤, 무슨 종류의 정면 돌파인지는 이제 내가 생각해 낼 일이지만 그의 답을 읽으니까 힘이 난다. 나 자신을 기쁘게 하고 타인을 이롭게 하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 믿고 있는 말. 되새기다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두고 보는 말이다.


  나는 살면서 소설을 쓸 계획이 있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거다. 그럼에도 하루키가 말하는 '소설가로서의 삶'에 관심이 가는 것은 결국 그의 삶의 태도가 비단 소설가만이 아니라 어느것에든 정진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이라면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것에 대한 답은 하루키가 해 준 것 같다. 



너무도 단순한 이론이지만 이건 내가 지금까지의 삶에서 내 몸으로 배운 것입니다.

육체적인 힘과 정신적인 힘은 균형 있게 양립하도록 해야 합니다.

각각 서로를 유효하게 보조해 나가는 태세를 만들어야 합니다.

싸움이 장기적일수록 이 이론은 보다 큰 의미를 갖게 됩니다.



  몸과 마음의 힘을 길러 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게 내가 찾아낸 그 대답. 촉수를 예민하게 길러서 풍요로운 사람이 되어야지. 그 풍요가 언젠가 나와 당신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하루키스트라면 당연히 읽고 행복할 책이고, 하루키스트가 아니더라도 삶과 직업에 대해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면 읽어서 후회할 것 같지는 않다. 결국 끝에는 다 만나게 되어 있는 법이라, 경지에 오른 이들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곤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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