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했다.
이렇게 되리란걸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고 해야 솔직한 태도일테다. 나는 내가 간섭을 시작하면 조급해 할 성격임을 알았고, 높은 확률로 네가 기대만큼 해주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어떻게든 내가 관여할 영역이 아니라며 참았다. 그래도 항상 혹시나하는 마음이 생겨.
신년이 되고 네가 공부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었다. 챙겨주는 게 좋다고도 했다. 만약 이 열정이 잠시 타오르는게 아니라 계속된다면 나는 미래를 더 단단하게 그려볼 수 있을 것 같았어. 만사를 다 제쳐두고 너를 위한 NCS 목록을 만들었다. 그 목록의 회사 분위기도 다 파악해 주려다 너무 나서지 않기로 했다. 건네주면서 행복했다. 목록을 보면 네가 더 의지를 불태워주리라 예상했던 것도 같다.
그런데 너는 역시나 기대만큼 공부해주지 않았다. '그런데'와 '역시나'는 한 문장에서 맞지 않는 말이다. '그런데'는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역시나'라는 부사를 쓰면서는 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너는 그 정도만 할 것이라 내가 이미 알았더란 뜻이기도 하고, 내 기대가 너무 과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나는. 과한 기대를 하고 제풀에 지쳐서 서운해 한다. 그러니까 항상 혹시가 문제인거야. 혹시나 과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꿈을 꿨었다.
나도 지루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나와는 행복하기만 하면 좋겠다. 그치만 그렇게 지금만 바라보고 살 순 없으니까, 이제는 싫은 이야기를 하는 나도 사랑해 줄지 모른다고 생각해봤어. 참고 참다가 도저히 안되겠어서 공부 이야기를 하자 네가 졸리다고 말했다. 그 말이 믿기 어려웠지만 괜한 착각이었으면 했다. 자소서 이야기는 내가 많이 참지 못했던 것도 같다. 기다리던 회사의 공고가 올라왔는데 왜 자소서를 쓰지 않지. 꾹꾹 참다가 한 번 말했다. 며칠 지나고 두 번째 말했다. 어제였다. 네가 또 잠이 온다고 했다. 기어이 한 마디 쓴소리를 던졌다. 그 다음엔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 모르겠다. 안녕, 잘 자.
내가 왜 이렇게 참지 못할만큼 조급한지 돌이켜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너와 긴 미래를 그려보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아무리 고민해도 지금의 직장을 그대로 다니는 너와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네게 이직을 기다려주겠다는 시간에 한정을 주었다. 아무리 네가 좋아도 기한의 끝이 오면 어린애 같은 사랑 타령은 안할거야. 눈 질끈 감고 아닌건 아니라고 끊어내야지. 하지만 네가 그 전에 날 안심시켜준다면 나는 사랑하는 너를 굳이 보내겠다는 다짐은 안해도 될 것 같았다. 혹여 이직이 되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만으로 좀 더 사랑해도 되지 않을까 기대도 품었다. 그래서 조급했다. 너를 딱 내 기준에 맞추고도 싶었고, 그렇게 된 너를 오래 가지고 싶기도 했어. 욕심이었다.
너와 나의 적당히는 다르다. 나는 내 기준을 네게 강요하고서 계속 너만 바라봤다. 삶의 중심을 나에게 두지 않고 상대에게 두고 있다는 말이 지금 이런 상태를 말하는 거였다. 남의 이야기는 참 쉬웠는데 내 일이 되고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미안해. 내가 널 괴롭혔어. 그게 사랑인줄 알았어. 너의 최선은 나의 최선과 다르고 나의 최선이 꼭 맞는 답이 아닌건데, 이 교과서 같은 말을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오로지 내가 안심하고 싶어서 그랬다.
네가 가장 위에 올라와 있던 것들에서 너를 하나씩 빼낸다. 적당한 거리, 적당한 무관심이 오히려 낫다. 그러고보니 매일이 저녁 약속으로 가득 차 있었을 때 나는 이정도가 아니었다. 또 그러고보니 네가 없으면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불안을 처음 생각한 때도 내가 시간이 많아진 이후였다. 너무 바짝 다가가서 사랑해도 관계를 망치는구나. 사랑하면 딱 붙어서서 사는 줄 알았다. 아무리 사랑해도 내 마음과 꼭 같은 사람은 없다거나 사랑해도 외롭다는 말은 결국 적당한 거리에 대한 말이었던 거다. 늦게 시작한 연애를 천천히 알아간다. 관계에서가 아니라 나에게서 단단함을 찾아야 한다.
나는 다시 우리가 행복할 길을 생각한다. 너에게 준 기한은 생각지 않고 무작정 행복하기만 하자는건 아니라서, 언젠가 그런 때가 오게된다면 난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할거다. 적당한 거리를 두는게 아니라 한 발을 빼는 기분도 들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나를 보호하는 길이라면, 지금 너와의 관계를 망치지 않는 길이라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 너를 많이 사랑해. 내가 사랑이라 잘못 건넸던 불안을 네게서 감출게. 나는 얼마전 처음으로 너를 내 사람이라 말했었는데. 불안을 공유하면서 느꼈던 안온함이 떨어져나간다. 그땐 나만 따뜻했을테니 그래도 이쪽이 건강한 모습일테다. 자식에게 잔소리를 하는 엄마가 아이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인정할 때 이런 기분이 드나,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내 감정이 흉측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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