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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2019.04.22. 풍성한 주말

by 푸휴푸퓨 2019.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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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변화하지 않는 듯 변화한다.

 

  지난 토요일에 남자친구를 데리고 은유 작가의 강연에 갔다. 아름다운재단에서 주최하는 나눔산책 행사를 통해서였는데, 부끄러운 액수지만 기부랍시고 하고 있어서 기부자라는 명찰도 달았다. 십일조 헌금을 내는 종교인만은 못하더라도 소득의 1% 정도는 이러구러 내고 산다. 강연은 경복궁 근처의 역사 책방에서 이루어졌다.

 

  꼼꼼하게 필기를 하지 않았으니 구체적인 말을 옮길 수는 없지만 그녀가 책에서 이야기한 것들과 대동소이한 내용이었다. 우리는 왜 글을 써야하는가.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아름다운 재단이 열심히 찍은 영상을 업로드해준다면 북마크 해두고 오래도록 반복해 들을 것을 다짐하면서-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삶에 대해, 또 나아가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자꾸 생각한다. 나는 그녀가 말하는 글쓰기가 자기 성찰을 동반하고 있다는 점이 참 좋다. 나를 깨부수는 망치 같은 책을 읽고 항상 반성하며 살자. 작가의 편안한 육성으로 직접 들으니 정말이지 더 좋았다.

 

  강연의 소감을 적는 설문지를 쓰다가 남자친구는 무어라 쓰고 있나 들여다보았다. 좋았지만 한쪽 이야기만 말씀하시는 것이 불편하기도 합니다, 란다. 노력은 하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부족한 그의 평소 생각을 알고 있다. 당연히 강연에서 불편해 할 말이 나올 것이라 생각은 했다. 그래도 막상 적은걸 보니 후기를 작가분도 읽으실 텐데, 네가 쓴 의도보다 더 강력하게 들리는 말인 것 같아 걱정이 됐다.

 

  서점을 나서 궁궐 담장을 따라 산책하며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역시나 평화주의자답게 자기는 다 같이 잘 지내면 좋겠는데 자꾸 불편한 이야기를 해서 그 지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단다. 어쩔 수 없지. 이야기하지 않으면 알아주지 않는걸. 나는 네게 밤산책을 너무나 자유롭게 생각하는 아들 두 명이 있는 너의 집과,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가 없고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딸 둘이 있는 우리 집을 이야기했다. 이런 차이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것과 알고 사는 건 전혀 다르니까 불편해도 계속 이야기하게 되는 거라고. 계속 들어 줄거지? 애교 섞인 내 말에 너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어디까지 내 마음을 이해했을지 확신할 순 없지만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 나와 이야기를 하고 나서 어쩐지 어머니가 평생 좀 외로우셨을 것 같다고 생각한 너. 지금은 나를 위해 억지로 참으면서 강연을 가더라도 언젠가는 그 껄끄러움이 더 작아지기를 빈다. (이때 알쓸신잡3에서 김상욱 교수가 이야기했던 여자 동료 이야기를 언급해 주었으면 더 이해를 잘해줬을 텐데 뒤늦게 떠올라 아쉬운 마음이 있다.)

 

  일요일에는 문득 박웅현 작가의 여덟 단어를 집어 들었다. 처음 읽고는 나답지 않게 바로 재독했고, 주기적으로 다시 읽어보자 다짐하며 덕지덕지 붙인 포스트잇과 함께 꽂아 둔 것이 벌써 몇 년 전인가. 인생 롤모델은 더 이상 없더라도 본받을 어른만은 있겠지 싶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분이다. 덕분에 나를 지킬 수 있는 태도를 처음 배웠다. 삶에 대한 내 태도를 다시 점검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읽었다. 생각해보니 이 분의 유명한 책 제목이 책은 도끼다이기도 하고. 그때는 카프카를 몰랐네.

 

  몇 년 전의 내가 표시해 놓은 곳을 따라 읽는 독서는 재미난 경험이었다. 표시하고 싶은 곳이 여전히 거의 같다는 점이 재미있기도 하고 또 조금 달라졌다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그랬다. 나를 지키자. 소신을 잃지 말자. 그럼에도 열린 사고를 하자. 항상 세상에 촉수를 세우자. 고전을 읽자. 제대로 보자... 맞다. 어쩌면 이 책을 기점으로 나는 좀 많이 달라졌던 것도 같다. 그리고 달라진 방향으로 생각보다 잘 나아가고 있다. 나는 매일 나를 좀 더 사랑한다. 더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고.

 

  처음 박웅현 작가의 이야기를 접하고 이렇게 살고 싶다 생각했다면 지금 나는 내가 이 나이가 되었을 때 이런 책을 쓸 수 있을지 아득하다. 몇 년 전에는 당연히 될 거라고 생각했나 봐(그 사이에 많이 겸손해졌다). 다만 한 가지 읽다가 걸렸던 부분은 남자는 여자의 말을 따르는 편이 현명하다는 식의 부분. 여자의 장점을 추켜세우며 남자는 이런 부분에서 여자를 따라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예전이라면 전혀 불편해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의 난 싫어. 여자가 더 현명하니 남자는 여자를 따르고 여자는 남자를 돌봐준다거나 그런 식의 발상은 그저 한쪽에 돌봄의 부담을 지우는 말일뿐이다. 인간은 개인 각각의 특성이 있다. 그냥 모두 다 각자 잘 서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두 명의 작가를 만났던 주말이었다. 풍성했다. 은유 작가의 쓰기의 말들을 미리 사서 사인을 받아올 걸 그랬나 하는 후회를 하고 있다. 몇 년 전의 나와 조우하고 여전히 당시의 멘토가 유효함을 발견하는 시간도 참 좋았다. 은유 작가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가 되었다면 (박웅현 작가에게 그러했듯이) 강연을 한 번만 들을 리는 없지. 또 뵐 기회가 오면 그때는 꼭 사인을 받아야겠다. 받아놓고 또 몇 년을 책꽂이에 꽂아둔다 해도 괜찮다. 반드시 어느 날 문득 읽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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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0.

학교에 강연 온 은유 작가를 보기 위해 조퇴를 했다. 싸인도 받았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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