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산책의 말 시리즈를 계속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좀 쉬는 시간이 많이 생긴 김에 두 권을 빌렸다. 먼저 수전 손택의 말을 읽었는데 여러 가지 생각을 했지. 말 시리즈는 내가 화자를 잘 모르더라도 굳건한 자신만의 사상이 있는 이의 말을 정리한 것이라 이해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책에서 내가 느낀 수전 손택은 자유로우면서도 사생활을 보호하고, 경계를 넘나들면서도 중용을 지키는 단단한 여성이다.
자, 내가 원하는 건 내 삶 속에 온전히 현존하는 것이에요. 지금 있는 곳에, 자기 삶 '속'에 자기 자신과 동시에 존재하면서 자신을 '포함한' 세계에 온전히 주의를 집중하는 것 말입니다. 사람은 세계가 아니고 세계는 사람과 동일하지 않지만, 사람은 그 안에 존재하고 그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지요.
날이 갈 수록 카르페 디엠을 실천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미래 고민과 과거 반성이 물론 일정 정도 존재하는 게 좋지만 두 가지에 일상이 함몰되면 집중이 되지 않는다. 오감으로 느끼는 현재가 줄어든다. 나의 세계가 줄어든다.
그러다 거울을 보면 이 늙은 얼굴을 보게 되는 거죠. 그러니 그분들은 늙은 몸뚱어리에 갇힌 열네 살짜리 같은 느낌을 받는 거예요! 사람은 이처럼 소멸하는 육신에 갇혀 있어요. 딱 그만큼만 버티도록 설계뙨 기계처럼 결국은 고장이 나버릴 뿐 아니라 서서히 퇴락해서 세월이 갈수록 기능이 떨어지는 걸 눈으로 볼 수가 있지요.
나는 딱 스물 일곱이 되면서 노화를 처음 느끼게 됐다. 얼굴의 기름이 줄어들었다. 운동을 하고 나면 힘든 상태로 끝이 아니라 개운함이 뭔지 알게 됐다. 소화 능력이 떨어졌고, 피로 회복도 오래 걸렸다. 나이가 든다. 마음은 젊은 시절과 다르지 않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더 크게 공감하기 전에 어떻게든 관리해야겠다고 얼쩡거리게 됐다. 안 늙기 위해서는 아니고, 좀 더 잘 늙고 싶어서.
어떤 이십 대의 젊은이-남자든 여자든-가 육십이나 칠십 대의 노인들과 함석하게 된다면 그 중 한 노인이 아마 "늙은이 다섯이랑 앉게 되다니, 지루해서 어쩌지!"라고 말할 수도 있지요. 여자들에 관한 논점은 명백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데, 늙음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얼마나 한심해하고 창피해하고 초라해하고 변명해야 할 것은 같은 기분을 느끼는지 논의가 되지 않았아요.
바로 앞에 남자 1명과 여자 5명이 있을 때 "여자 다섯이랑 앉다니 어떡해요!"라는 일화에서는 잘 와닿지 않았는데 젊은이-늙은이 구도의 설명을 보고는 이게 얼마나 불합리한지 한 번에 와닿았다. 아마도 여자 다섯의 예는 이제 더이상 들기도 어려운 낡은 사고방식이지만 나이든 사람이랑 앉아서 불편하겠다는 말은 나도 너무나 자주 들었기에 그렇겠지. 젊은 사람들은 나이 든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나이듦을 비하하는, 나도 몰랐더 나의 평소 고정관념에 화들짝 놀랐다. 생각해보고 내가 먼저 다가서야겠다는 생각도 해본다(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노인의 한계라 여겨지는 것들을 뛰어넘고 있는 박막례 할머니를 젊은이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것처럼 사실은 그렇게 다르지 않은 존재들일 뿐이야.
중퇴하는 사람들은 다 어디가 잘못된 거라고 누가 그래요? 전 세상이 주변적인 인간들에게 안전한 곳이 되어야 한다고 봐요. 좋은 사회의 최우선 요건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주변성을 허락하는 거예요. 자칭 고안주의라는 국가들이 그토록 끔찍한 건 그들의 관점이 학교 중퇴자나 주변적인 사람들을 포용할 여유가 없다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든, 길바닥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있을 가능성을 두어야만 해요.
비록 나도 모두가 '안전'하다고 여기는 코스를 전혀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지만 주변적인 삶도 인정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에는 깊이 공감했다. 하지만 그 공감이 위선적이라고만 자꾸 생각이 드는 것은, 남자친구가 어떻게든 안전의 굴레에 들어오기를 너무나 진심으로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율배반적인 마음은 아직 주변적인 존재는 생존 자체가 너무 어려운 우리 사회 때문이라고 말해도 될까. 나부터 변하지 못하는데 무엇을 탓할까 싶기도 해.
콧: 에밀리 디킨슨이 쓴 글처럼 "꽃망울과 책들, 슬픔을 달래주는 이런 위안들"이군요.
손택: 그래요. 독서는 제게 여흥이고 휴식이고 위로고 내 작은 자살이에요. 세상이 못견디겠으면 책을 들고 쪼그려 눕죠. 그건 내가 모든 걸 잊고 떠날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우주선이에요. 그러나 제 독서는 전혀 체계적이지 못해요. 굉장히 빨리 읽는다는 점에서는 아주 운이 좋은 편이죠. 대다수 사람들에 비해 저는 속독가라고 생각되는데, 많이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대단히 유리하지만 어디 한 군데 진드근히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단점도 많아요. 저는 그냥 전부 흡수한 후에 어디선가 숙성되기를 기다리거든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식하답니다. (중략)
저는 진심으로 역사를 믿는데, 그건 사람들이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가치죠. 전 우리가 행하고 사유하는 게 역사적인 창조물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신봉하는 게 별로 없지만 이건 확실히 진짜 믿음이에요.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거의 대부분이 역사적으로 뿌리가 있다는 것이고 우리는 본질적으로 아직도 여전히 그 시기에 형성된 기대와 정서를 다루고 있단 말입니다. 행복, 개인성, 급진적인 사회변혁 그리고 쾌감 같은 관념들이요.
너무 좋아서 적어두지 않을 수 없었던 부분! 내 마음과 너무 꼭 같아서 무어라 부연할 필요도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래도 손택보다 내 읽기 속도가 더 느릴 것 같기는 하지만 우후, 나랑 또-옥같은 생각을 하는 살마이 또 있다는 건 너무 반갑다. 나의 우주선! 무식한 나! 그래도 우리는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모든 건 다 역사 안에서 반복되고 있단 말이지!
제 말은 '산다'는 건 일종의 공경이에요. 세계 안에서 움직이다 보면 온갖 차원에서 공격과 연루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타인이 점유할 수 없는 공간을 점유하고 걸을 때마다 식물군, 동물군, 작은 생물들을 짓밟게 되죠. 그러니까 삶의 리듬의 일환으로서 '정상적'인 공격이라는 게 있다는 거죠.
이 '정상적'인 공격의 정도가 얼만큼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우리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얼만큼이나 다른 존재를 공격해도 될까. 비단 식물, 동물, 작은 생물뿐만 아니라 때로는 다른 사람까지도 공격하게 되는 때가 와. 타인은 절대 상하게 하면 안되는 존재인가 아니면 나부터 살고 볼 일인가. 타인을 상하게 하고 나서는 얼만큼의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가. 주변에 자꾸 해를 입힌다면 내가 살아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모두 동글동글하게만은 살 수 없나. 이런 고민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때마저도 있는, 그런 상처를 때로 입기도 한다. 자꾸 옹송그리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다.
콧: 아르킬로코스가 쓴 고대 그리스의 파편적 단상들을 생각해 보세요. 실제로 과거 독특한 전체였던 것의 잔해에 불과하지만 지금까지도 그 여운이 우리를 깊이 감동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중략)
손택: 전 사진이 파편의 형식으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스틸 사진의 본질은 파편의 정신 상태를 지닌다는 것이에요. 물론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기는 하지요.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관련지어보면 우리에게 남겨진 과거의 의미심장한 편린이 되거든요. "그래, 우린 그때 너무나 행복했지. 우리는 거기 서 있었어. 당신은 아주 어여뻤지. 그리고 난 이 옷을 입고 있었고. 우리가 얼마나 젊었는지 좀 봐..." 그런 거 말이에요. 제 말은, 사진을 찍는 당시에는 그런 기분으로 하는 게 아니겠지만, 시간이 사진을 변화시킨다는 거예요.
전체였던 것의 잔해인 파편은 우리에게 다양한 감상을 제공한다. 때로는 전체와는 전혀 다른 맥락이 되기도 하지. 시간이 사진을 변화시킨다는 말에 마음 깊이 공감한다. 이에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의 사진을 더 찍어두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해. 미래에는 그 파편을 보면서 아파하기보다 행복해 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제가 가장 오랫동안 참여해온 투쟁 중에는 사유와 감정의 분리를 타파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요. 이런 이분법이야말로 사실 모든 반지성적인 견해들의 기반이죠. 심장과 머리, 사유와 감정, 판타지와 분별... 전 그런 이항 대립이 옳다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충 비슷한 몸을 가지고 있지만 아주 다른 종류의 생각들을 합니다. 전 우리가 몸보다는 문화로부터 제공받는 도구를 더 많이 활용해서 생각한다고 봐요. 따라서 세상에는 훨씬 다양한 각양각색의 생각들이 있는 거고요. (중략) 사랑이 이해를 전제로 깔고 들어가지 않아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온갖 생각과 판단에 연루되는 일이죠. 바로 그런겁니다. 육체의 욕망, 욕정의 지적인 구조가 있단 말이에요. 그렇지만 사유와 감정을 구분하는 종류의 사고는,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을 품거나 안일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들을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에, 쓸데없는 말썽을 잔뜩 초래하는 선동의 일환입니다.
글쓰기의 주제, 태도를 남녀에 따라 갈라버린 것(남자는 이성, 여자는 감성이라며)을 반대하는 손택의 말에 크게 동의했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기도 전에 사회가 주입한 성적 고정관념을 내재화한다. 그 특성들이 자연스럽지 않다고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릴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나를 부정해내는게 힘들고 오래 걸리더라도 꼭 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맥락과 상관없이 아무 말이나 할 수가 있어요. 현대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본질은 어떤 말이든 할 수 있고, 모든 맥락은 동등해서 사물이 동시에 서로 다른 맥락들 속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죠. 사진이 그래요. 그렇지만 그런 상황은 심각하게 타협적인 데가 있어요. 물론 전례 없는 행위와 의식의 자유를 허락하기 때문에 엄청난 이점이 있기도 하죠. 그러나 독창적이거나 심오한 의미들이 훼손되지 않도록 보존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해요. 실망을 주고 오염되고 순수성이 희석되고 변형되고 형질이 전환될 테니까요. 그런 세상에서는 모든 게 재활용되고 다시 혼합되어 결국 하향 평준화되고 말죠.
으악! 내가 요즘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많이 찍고 싶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구구절절 나와있네. 너무 많은 사진에 압도당해 산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그 질이 막 좋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스팸처럼 느껴지는 누군가의 사진에 나는 질린 기분으로 나라도 한 장이나마 덜 찍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대체 손택은 스마트폰을 구경도 못했으면서 이런 통잘을 그때부터 했어요!? 뭔데!
아무리 돈키호테적이라 해도, 모가지 두세 개라도 더 자르려고 애쓰는 프리랜서들이 있어야 한다고 보거든요. 착시와 허위와 선동을 파괴하려고 애쓰는, 그래서 만사를 더 복잡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해요. 만사를 더 단순하게 만들려는 불가피한 기류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내게는, 그 무엇보다 끔찍한 일이라면 아마 내가 이미 다 쓰고 얘기한 내용에 동조하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그게 아마 날 그 무엇보다 불편하게 만들 거예요. 왜나하면 그건 내가 생각하기를 멈추었다는 뜻일 테니까요.
나의 생각을 멈추지 말자. 결국 결론은 깨어있자는 거다. 촉수를 다 죽이고 편하게만 편하게만 사려고 하지 말자. 안주하지 않기를, 예민한 사람이 되기를. 자꾸 깨어있자고 나를 채찍질해야 한다. 그래야 더 나은 사람이 될 기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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