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언니에게 선물로 준 책이 책장에 꽂혀 있었다. 제목과 일러스트를 보고 코웃음을 쳤다. 또 그렇고 그런 힐링 도서구만. 누가 이런 책을 선물했담. 보노보노와 푸의 힐링이 서점 곳곳에 깔린 게 마음에 들지 않을 때였다. 사회생활 조금 한 20대 젊은이가 나에게 이 사회는 맞지 않는다고, 나만의 길을 가겠다고 외치는 그런 책이겠지 뭐.
몇 달이 지나고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가장 생각이 없어도 되어 보이는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금방 다 읽었고, 내 생각이 완벽히 틀렸음을 알았다. 저자가 나랑 참 다른데도 굉장히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다. 저자가 20대일거란 나의 예상은 틀렸다. 40대의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작가는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운영해 나가며 충분히 만족한다고 말한다. 모든 면에서 그와 동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기본적으로 성격이 너무 달라! 나는 플랜맨 인생인데 이분은 만만디 인생이다. 덕분에 만만디를 좀 더 이해하게 되기도 했지) 그가 말하는 삶의 방향성에 매우 동의한다.
열심히 했다고 반드시 보상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열심히 안 했다고 아무런 보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왜 우리는 노력이 우리를 배신하는지, 그럼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어도 난 답을 알지 못한다. 다만 괴로움을 줄이는 법은 안다. 분하지만 ‘인정’해버리는 것이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고, 노력한 만큼 보상이 없을 수도, 노력한 것에 비해 큰 성과가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괴로움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음을 이해하는 게 철들기의 첫 번째 관문인지도 모른다. 노력이 나를 배신한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노력하지 말자. 그냥 좋아서 하자. 그리고 인정하자. 보상이 없어서 실망하지 않게 꾸준히 재미를 찾아야겠다.
열정은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지 절대 강요로 만들어질 수 없다. 열정은 사랑이다. 그 일을 사랑하는 것에서 열정은 시작된다.
열정은 사랑이다! 역으로 사랑은 열정이라고도 쓰고 싶다. 너를 알아가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는 열정이 사라지면 사랑도 사라진다. 난 많은 것들을 사랑하고 싶다. 그 사랑으로 작은 행복을 자주 누리고도 싶고.
내가 이 나이에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내 나이에 걸맞은 것들을 소유하지 못한 게 아니라, 나만의 가치나 방향을 가지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그렇다니까! 나이가 들수록 섬세한 취향을 소유해야 한다. 취향은 내가 걸어온 길을 보여준다. 아직은 정교하지 않아도 용서가 될 나이지만, 40살이 되면 ‘나=000스타일’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요즘 꽂힌 단어는 군더더기 없는 ‘단정’! 계속 바뀌겠지만 말이야.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다.
어떤 길을 고집한다는 것은 나머지 길들을 포기하고 있다는 이야기와 같다.
어쩌면 우리는 정말 원하는 것을 모르고 헛된 것들로 허기를 채우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일을 할 때 ‘이 일을 하느라 다른 일을 못해도 괜찮은가?’에 대한 답을 “솔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솔직하게’에 방점이 찍혀 있다고 생각하는데, 스스로를 속이기도 쉽기 때문이다. 취준생 때 제일 많이 고민한 건 ‘돈을 많이 버느라 행복을 포기해도 괜찮은가? 정말?’이었는데 그 대답을 솔직하게 이끌어낸 것에 지금도 매우 만족한다.
나도 모르게 주입된 욕망으로 인해 삶의 일부를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많은 길을 협소하게만 보고 지나쳐서도 안 되겠지. 우리는 정말 원하던 걸 갑자기 원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내게는 화장이 그렇다. 내가 정말 화장을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조금이나마 고쳐진 얼굴을 들고 다녀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음을 알았다. 이제 내게는 민낯도 괜찮다는 신념과 원하면 언제든 화장을 해낼 수 있는 (약간의) 스킬만이 남았다. 얼굴에 그림그리기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어서, 가끔 얼굴에 색색을 발라보고 신나하기는 한다. 하지만 신남을 위한 화장이지 예의를 갖추겠다는 이유로는 화장을 하지 않는다.
결국 나는 깊게 고민하고, 고민의 결과에 몰두해야 한다. 이유를 알고 하는 몰입은 값지다. 그게 멍 때리기라도! 언젠가 몰두하던 대상에 흥미를 잃더라도 분명 내게는 무언가 남는다 믿는다.
결국, 직장인들은 자신의 시간을 팔아 돈을 버는 게 아닐까?
아빠가 이 얘기를 했을 때 정말이지 깊이 공감했고 그래서 내 시간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말자. 그렇게 갖고 싶어 하는 돈만큼이나 소중한 게 시간이다. 투자를 하면서 알게 된 건 지금 내가 버는 월급만큼의 이자를 매월 받으려면 원금이 어마어마해야한다는 점이다(이자를 높게 쳐줘서 4%라 했을 때, 6억 원이 있어야 한 달에 세전 200만 원이 나온다. 세상에!). 그렇다면 내 시간의 가치가 그 원금만큼이 된다는 건데, 더 허투루 쓸 수가 없지.
나는 같은 방향끼리 짝을 지어 하교하는 게 싫었다. 같은 방향의 친구들을 따돌리거나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혼자 집에 가는 걸 좋아했다. 그 30분이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참 좋았다. 걸으면서 여러 공상을 하다 보면 어느새 집에 도착해 있었다. 어떤 날은 집이 좀 더 멀었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으니 그 시간을 어지간히 좋아한 모양이다.
나는 요즘도 공상을 한다. 혼자 걷는 시간이 좋고,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소리 내어 한다. 10대 시절 시도 때도 없이 (볼륨 조절도 못 하고) 혼잣말을 했다면 이제는 조절이 된다. 싫은 버릇이기도 했는데, 상상과 공상이 줄어드는 게 안타까워진 순간 소중히 여기게 됐다.
걸으면서 공상만 하는 건 아니다. 산책은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준다. 코앞에 닥쳐 생각했던 일들을 한 걸음 뒤에서 보면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찾는 경우가 많다. 산책 세 번이면 한 번은 깊게 생각하길 잘했구나 싶은 깨달음을 얻곤 한다. 다만 이때는 소리 내는 혼잣말이 나오지 않는다(왜 그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반추이건 공상이건 걸으며 하는 생각은 다 좋다.
아, 나는 좀 더 저질렀어야 했다. 망하더라도 말이다.
백종원의 유튜브 영상을 보다 인상 깊은 이야기를 들었다. 백종원은 멋있어 보이기 위해 일단 좋은 말을 어쩌다 했는데,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살다보니 그 자리까지 갔다는 거다. 좋은 동력이라 생각해서 나도 요즘 다짐들을 주변에 말한다. 우리집이야 조심하는 게 집안 내력이니 나는 좀 더 과감하게 해도 된다. 그래봐야 진짜 과감한 사람의 발끝에도 못가! (그래서 말한 다짐에는 역시나 하반기 10km 마라톤이 포함되어 있다. 진짜 해야 되는데..!!)
전에는 미래를 위해 인내하며 돈을 벌었다. 내게 돈을 번다는 건, 곧 무언가를 참고 버티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현재의 자유로움과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번다. 참는 것이 아닌 기쁨을 좀 더 맛보기 위한 능동적인 행동이다. 많이 벌 필요도 없다. 지금의 생활을 유지할 정도만 벌면 돈다. 검소하게 살면 더 게으르게 살 수 있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만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 현재가 만족스럽다면, 현재 필요한 돈만 있으면 되는 거지 무조건 더 쌓자며 에너지를 소비할 필요가 없다. 나의 욕망을 정확히 찾아내면 나는 지금보다 검소해질 수밖에 없다. 내 욕망은 얼마만큼의 돈을 필요로 하는가? 생각보다 많은 돈은 아니지 않은가?
이야기는 인생이다. 다양한 인생이 이야기 속에 있다. 그러니까 나는 인생에 중독된 셈이다. 읽어도 읽어도 새롭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궁금하고 재미있다.
더 많은 이야기를 안다는 건
더 많은 이해를 갖게 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으아니, 저 사찰하셨어요! 내가 책을 읽는 이유와 정확히 같은 이 구절을 본 순간 이 작가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맞다. 나는 인간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자꾸 책을 더 읽고 싶다. 이 세상이 궁금하다. 그리고 내가 더 잘 이해했으면 좋겠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문득 이 문장을 읽다가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다. 나는 이제까지 ‘즐기는 자’는 너무 쉬워서 즐기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님이 어째서 이제야 보이는 걸까. 천재든 노력파든 상관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들은 결국 재미를 찾는 사람보다 행복할 수 없는 거다. 역시 인생 결국은 재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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