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구독을 시작했다. 코로나바이러스 덕분이다. 평일 저녁이고 주말이고 약속은커녕 운동도 가지 못하니 시간이 한없이 늘어났다. 책만 보기도 지친 참에 보고 싶은 다큐멘터리가 넷플릭스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2014년 미국에서 넷플릭스를 써본 적은 있는데 한국에선 서비스가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좋은 기억이었겠다 다큐도 보고 싶겠다, 핑계가 좋아 얼른 가입했다. 한 달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단다.
처음에는 생각할 거리가 있는 컨텐츠만 보고자 했다. 예술 영화를 보고 다큐멘터리를 봤다. 하지만 드라마 광고로 눈이 가는 본능적인 흐름을 거역할 수는 없더라. 어느새 나는 오래된 영국식 아침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감정 소모도 생각도 전혀 필요 없는 내용의 이 드라마는 이미 방송된 시즌이 무려 8개다. 지금 보는 시즌 2의 사람들은 스마트폰조차 쓰지 않는다. 이걸 왜 보고 있나 싶으면서도 본다.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간다.
넷플릭스 가입일이 3월 1일이니 어느새 15일도 넘게 영상을 봤다. 그 사이 몇 년간 잠들어 있던 아이패드2(무려 2011년 산)를 깨우고 어찌어찌 어플도 깔았는데 화면이 크니 좋긴 좋다. 더욱 편안한 시청을 위해 아이패드 거치대도 샀다. 침대에 누워 더 이상 게으를 수 없는 자세로 멀뚱히 화면을 본다. 책은 단 한 장도 읽지 않았다. 영상은 켜자마자 빠져드는데 책은 몇 장을 참고 넘길 집중력이 필요하다. 자연스레 아이패드 버튼부터 누른다.
책과 영상은 다르다. 사유가 흘러가는 시간을 누가 조절하느냐에 가장 큰 차이가 있다. 책은 속도를 조절하며 읽을 수 있고 마음에 드는 구절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표시를 할 수도 있다. 넘어갔다가도 돌아와서 다시 한번 읽어본다. 이런 점 때문에 종이책을 버리고 선뜻 전자책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기도 하지. 반면 시청자는 영상의 속도를 조절할 수 없다. 어느 장면을 보고 유의미한 생각이 들다가도 기록할 새 없이 어어어 하며 다음 장면을 따라간다. 결국 끄고 나면 깊이 기억에 남는 상념이 없다. 영상을 되감기 하여 볼 수도 있긴 한데 흘러가는 이야기를 붙잡고 되돌리려니 마음이 꽤나 수고롭더라고. 와중에 동영상은 되감기나마 가능하지만 TV로 보고 있었더라면 정말 아무 방도가 없었을 테다. TV가 왜 바보상자라 불렸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내용이 가벼워서가 아니라 내가 생각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었어.
많은 시간을 생각 없이 보내니 다른 시간에도 생각이 사라졌다. 상념이 떠오르다가도 수면 밑으로 사라진다. 생각이 없으니 쓰고 싶은 글도 없다. 그래서 지난주에는 아무 글도 쓸 수 없었다(고 핑계를 대어본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시간은 잘도 가더라. 봄꽃 같은 신입생이 없는 교정은 3월인지 2월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2월의 연장에서 계속 살았다.
친구의 블로그에서 '항상 발전하고 싶다'고 말했던 2~3년 전의 자신은 어디 가고 이리 무력한 나만이 남아있느냐는 질문을 읽었다. 그러게, 발전보다는 무념무상 속 평안을 선호하게 된 내가 걱정스럽다.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으려 했건만 잠깐만 방심해도 이렇게 무너진다. 넷플릭스를 어떻게 통제할지 생각을 좀 많이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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