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마켓을 시작한 이래로 이틀에 한번씩은 거래를 하는 기분이다. 오늘도 무려 세 개의 덩어리를 들고 출근했다. 주말에는 처음으로 물건을 구매해보기도 했다. 오랫동안 살까말까 고민하던 물건인데 절반값에 새상품을 구입하게 되어 기분이 좋다.
중고 거래에 이리 열을 올리니 중고와 관련한 책을 읽어 보는 게 인지상정! 이 책에는 핀란드의 중고 문화에 대한 소개와 작가가 핀란드에서 살면서 경험했던 중고 문화, 그리고 인터뷰가 담겨있다. 인터뷰 대상은 실제 중고가게를 운영하는 주인, 중고가게 이용자, 벼룩시장 행사 기획자 등으로 중고 거래 문화가 잘 발달한 사회의 실제 모습을 살펴볼 수 있어 흥미롭다.
핀란드는 사회 내 빈부격차가 적어 중고문화가 발달할수 있었다. 북유럽 국가 특유의 복지 덕분에 핀란드는 누구나 일정 수준 이상의 여유를 누리고 살 수 있다.
그동안 내가 생각해온 여유의 정의는 경제적인 능력과 직결되어 있었다. 이것도 맞는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구매해야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 도움이 돈다. 그러나 이 사회에는 개인의 돈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다른 무언가가 있음을 느꼈다.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은 공공재가 잘 발달해 있다. (중략) 소득 수준이나 재산 유무 등에 관계없이 국민 누구나 자신에게 맞는 혜택을 받고 보호를 받을 수 있으며 이러한 사회 안전망이 이들에게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여유를 선사하는 것이다.
중산층이 오래 쓸만한 양질의 디자인 상품이 많고 해당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유사 계층도 많아 중고 상품이 원활하게 회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마리메꼬, 이딸라와 같은 브랜드가 디자인이 잘 된 양품의 좋은 예다.
흔히 중고 가게라고 하면 낡고 오래된 제품을 무료로 기부하거나 아주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가게와 아주 고가의 희귀한 골동품을 취급하는 가게, 이렇게 양 극단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다. 헬싱키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살며 다양한 중고 가게를 살피다 보니 한 가지 흥미로운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핀란드에는 중고 가게가 세분화되어 이 양극 사이를 메우는 가게들이 많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중고 가게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가게는 '아름다운가게'가 유일하다. 막상 발걸음을 들이기 시작하고부터는 항상 가게 안에 사람이 꽤 많음을 알게 되었지만 직접 인연을 맺기 전 아름다운 가게의 이미지는 내게 '저소득층에게 좋은 물건을 저렴하게 제공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 내용을 담은 영상물을 보았던 것 같은데, 뭐 저소득층 결손가정 아이에게 저렴한 양질의 옷이 제공될 수 있도록 좋은 물건을 기증해달라는 내용이었던가. 기증을 촉진하기에 좋은 내용이었을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 국내 중고 거래를 활성화시키는 데는 별로 영리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중고 가게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물건들은 결코 누군가가 내다버린 물건이 아니다. 타인이 나만큼 혹은 나보다 훨씬 더 잘써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수고스럽게 가게까지 가져온 물건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중고 가게에 놓인 물품은 이전 주인들이 '다른 사람이 쓰기에 좋겠다'고 생각해서 내놓은 물건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 나만 해도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집에서 잠자고 있는 물건을 누군가 깨워 사용해주기를 바라서 당근마켓을 이용한다. 이미 생산된 물건을 필요한 누군가가 산다면 새 제품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 좋은 물건을 내놓다보면 막상 내가 사용하려 남겨두는 물건은 흠집난 경우도 잦다.
그러나 핀란드의 중고 문화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한 인터뷰이는 중고 거래 행사에서 판매되는 물품의 다수가 의류에 집중되어 있고, 그중에서도 패스트 패션 브랜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가게별 특징을 살리고 싶은 소규모 중고 가게의 고민거리도 바로 이 패스트 패션 의류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자연스러운 의문이 하나 떠오른다. 이렇게 중고 문화가 활발해졌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물건의 수가 많아졌다는 이야기 아닐까?
"중고 가게에서 팔리는 물건들이 다 어디에서 올까 생각히보면 답은 단순합니다. 사람들의 소비가 그만큼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이야기죠. 중고 문화가 활발해졌다고 해서 사람들이 환경을 생각한 소비를 시작했다는 뜻이 아니에요. 전보다 많은 소비를 하고 있고, 전보다 많은 물건이 중고 시장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어요.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소비가 많은 시대를 살고 있어요."
핀란드에서 중고 거래 문화가 활발해 진 이유는 뭘까? 저자가 인터뷰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핀란드에서는 1990년대 초부터 중고 거래가 활성화되었다. 환경 문제에 대한 각성과 경제 위기가 종합적으로 작용해 대중의 중고에 대한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렸지.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생산품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들이 마리메꼬의 예전 시즌 옷을 구할 수 있었던 마리메꼬와 어느 중고 가게와의 협업 행사에 열광했다는 이야기는 다시 말해 마리메꼬가 매번 새로운 디자인의 옷을 생산하고 있다는 뜻이다. 마리메꼬만 그렇겠는가. H&M이 스웨덴 브랜드인걸 생각하면 북유럽도 결국 과한 생산 문제는 함께 겪고 있다.
자연을 사랑하는 소박한 이미지의 핀란드이니까 중고 문화가 발달했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완해주는 내용이었다. 어느 사회나 고민은 비슷하다. 다만 핀란드는 국가가 국민의 최저 생활을 보장해 주었기에 사람들이 양질의 중고 물품을 공통적으로 향유할 수 있었다는 부분에서 큰 부러움을 느낀다. 부디 우리나라에도 중고 물품에 대한 인식이 나아지기를, 개인이 운영하는 개성있는 중고 가게가 많아지기를, 다양한 취향의 중고 가게가 성업하여 과도한 물건 생산을 막고 환경도 지킬 수 있기를 바라본다. 단순한 중고 가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빈부격차부터 해결해야하는 일이었을까. 앞날이 멀다. 그 전까지는 당근마켓이라도 열심히 이용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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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발견한 토스피드 저자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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