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와 E의 경계에 있는 나는 진정한 자신의 성격을 알고 싶으면 학교에 가기 전 자신의 성격을 생각해보라는 제안에 크게 감탄했다. 흠. 유치원에 다니는 내내 친구들과 말한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불편한 줄도 몰랐다가 아빠참여수업 후 아빠의 말을 듣고(허리를 이렇-게 구부리고 혼자 앉아있더라나) 처음으로 태도를 돌이켜 보았다. 그런가 하면 초등학교 1학년 때 교장선생님은 엄마 뒤로 숨는 나를 보고 차렷, 열중쉬어 자세를 본인의 성에 찰 때까지 가르쳤다(엄마는 저쪽에 계세요!). 지독한 I였다는 얘기.
이런 나도 20년을 훌쩍 넘는 학교 생활과 직장 생활을 겪고 나니 때로는 E000의 진단 결과를 받는 수준에 이르렀다. 스무살이 넘어서는 대체로 E를 받다가 최근 I로 돌아와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던 중, 내가 쓴 책인가 싶을 정도인 책을 만났다. 누군가 딱 나라며 책을 추천해 준 것으로 보아 어쩌면 나는 한눈에 봐도 내성적인 사람인데 혼자 고민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성적인 사람은 사실 선택적인 수다쟁이다. 내가 글을 쓰게 된 것도 어쩌면 피곤하지 않은 수다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친구와의 수다는 즐겁지만 수다를 떨러 나가는 모든 행위가 피곤하다. 더 자주 만나자는 친구에게 늘 '너네를 만나고 싶지 않은게 아니'라고 변명한다. 혼자서 하고 싶은 말을 끊임없이 할 수 있는 글이 편해. 이렇게 생각하면서 책을 읽어나가는데 심지어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작가님, 저 사찰하셨어요?
사람들과 왁자하게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외향인의 성향은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종종 집에 빨리 가고 싶어하는 내향인의 성향에 대해서는 조목조목 설명을 요구한다. (물론 이 말이 내향인이 자기 입으로 상대에게 그런 설명을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제는 친구가 저녁 약속이 깨졌다며 혹시 번개를 치겠느냐고 말을 걸어왔다. 월요일 저녁에 번개? 애초에 월요일 저녁 약속을 이해할 수 없는 나는 그냥 집에 가면 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했고 (당연하게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결론으로 대화가 끝났다. 이미 노는 텐션이 되어 있는데 어떻게 집에 가느냐는 자와 집에 가는 게 제일 좋은 놀기임을 왜 모르냐고 말하는 자의 간극이란. 신기하게도 우리는 10년 넘는 우정을 지키고 있다.
(타고난 외향인인 아기에게 아기 엄마가 말하는 이야기를 듣다가)
"다른 사람이 원할 때만 말을 걸어야 하는 거야. 다른 사람이 원할 때만 가야 하는 거야.." 온통 내향적인 유전자뿐인 인적 환경에서 살아온 나로서는 이색적인 훈육 장면이었다. 누군가가 오라고 잡아끌어도 가지 않는 게 인간의 기본값이 아니었던가. 저런 내용을 교육으로 교정해야 하는 인간형도 존재하는구나.
(중략) 인생길 톨게이트의 프리패스를 갖고 태어난 줄 알았던 외향인들이 그 프리패스 하나로만 온갖 고속도로를 달려야 하는 운명 또한 타고난 줄을 예전에는 몰랐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도 딱히 부러울 것 없이 나와 다를 바 없는 지구 위의 더부살이일 뿐이다.
말을 줄이는 교육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문화충격이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내성적인 태도를 수없이 교정받았던 것처럼 외향적인 태도도 교정받는구나 싶어 신기했고. 누군들 인생 쉽게 살겠나 싶은 마음이 반, 여기저기 참견하려면 소모되는 에너지가 많을테니 피곤하겠다는 마음이 반이다. 피곤하지 않아서 외향인인가?
(냉혹한 범죄 수사물이 취향인 이유)
일단 문화 상품으로 만들어지는 이야기에는 전부 일종의 자극이 있고, 그 자극 지점이 정서가 아니라 사건이 될 때 그나마 후유증이 덜하다는 걸 말이다. (중략) 같은 수사물이라도 상대적으로 감정적 거리가 가까운 '국산'은 좀 더 마음이 편할 때에만 보는 편이다. (중략) 어쩌면 나는 가끔 삶에서 분리되고 싶어서 수사물에 집착하는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내가 왜 해외 수사물을 초등학생때부터 좋아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완벽하게 정리해 준다. 우리나라 이야기는 현실적이라 볼 수 없지만 해외 이야기는 평생 모를 기분이라 마음이 편안하다.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는 헤어 나오기 힘드니 사건에 심리적 거리감을 두어야만 하는 형사(나 과학수사대) 이야기가 좋다. 겁도 많은 애가 왜 추리물을 좋아하느냐는 말에 대답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알겠다.
사고와 행동이 수렴적이고 타고난 에너지가 부족한 나는 사실 할까 말까 하는 대부분의 선택지 앞에서 '말자'는 쪽으로 기운다. 안 하는게 편하고, 내가 타고난 기질에도 더 맞다. 그러나 그렇게 기질대로 내버려두면 생각에 잡아먹혀 어느 곳에도 닿지 못하게 될 것을 알기에 일부러 나를 거슬러 '하자'를 선택한다.
내향인으로써 나보다 오래 살아온 작가님의 내공을 읽고 내키지 않더라도 새로운 일을 시도해야 한다는 자각을 했다. 최근에는 취향에 맞춰 단단히 일군 일상에 푹 파묻혔는데, 돌아보면 새로운 상황에 뛰어들었을 때의 예상치 못한 난관도 매력적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미숙할 때는 부정적인 감정이 아예 없는 삶이 행복한 삶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행복은 그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 것이었다. 행복은 우울이라는 감정마저 삶의 일부로 인정하고, 나대로 살아가면서 얻는 총체적 만족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 어떻게 이렇게 내 마음을 써 둘 수 있는지. 재미가 가득한 일상을 사는 에너자이저를 시기하며 나는 왜이렇게 단조로울까 자책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조용함 마저도 나라는 사실을 인정한 후 만족스럽게 혼자 있는 시간으로 파고들었다. 그 과정에서 나를 더 잘 알게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마음을 베낀 듯한 책이었다. 마지막으로 작가님이 정리해 둔 집순이의 원칙을 마음에 새기며 글을 마무리한다. 특히나 세 번째, 갈까 말까 하는 약속이 생기면 대체로 안갔는데요. 반성할게요. 가겠습니다!
집순이의 원칙
규칙적으로 생활한다. 집을 깨끗이 한다. 갈까 말까 하는 약속이 생기면 그냥 간다. 운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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