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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Book Review] 잡지의 사생활 - 박찬용

by 푸휴푸퓨 2020.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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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의 모든게 궁금하다면 읽어보시라

 

 

  고등학교 3학년 때 생활기록부에 적어야 하는 장래 희망으로 '잡지 에디터'를 기입한 적이 있다. 늘 선생님 혹은 사서를 적었더랬는데, 고3이 되고 보니 사범대나 문헌정보학과보다는 점수가 좀 남는 게 아닌가.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하던 '프로젝트 런웨이'와 '도전 슈퍼모델'은 패션과 화보라는 화려한 세계에 대한 나의 환상을 마구 부추겼던 터였고, 인터넷을 검색하니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면 된다고 했다. 옷은 잘 모르지만 글은 좀 쓰고 싶어 하니 피쳐 에디터가 되어야지. 늘 고전적인 모범생이었던 내가 평소의 나를 탈피하고 적었던 그 꿈은 공식적으로 남아있지 않다. 파일로 정리된 생활기록부를 나누어주며 담임선생님은 "장래희망에 쓸데없는 것 써 놓은 사람은 내가 적당히 바꿨다"고 말했다. 나를 똑바로 보고 한 말이었고, 그가 내 꿈을 사서라 바꾸었는지 선생님이라 바꾸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잠깐 불어간 바람이었던지라 포기한 에디터의 꿈이 아쉽지는 않지만 잡지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든 건 아니었다. 대학교에 입학해서도 보그니 바자니 하는 잡지들과 함께 하이 패션의 세계를 이해해보려 애를 썼는데 글쎄,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를 자꾸 바라보는 게 썩 즐겁지 않더라. 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물건의 가격이 미정인 이유를 알게 되었지만 그때의 난 신비주의를 위해 일부러 비밀로 하는 줄로만 알았으니 그런 잡지를 계속 읽을 순 없었을 게다. 

  이런저런 끝에 한국은 결과적으로 접하기 쉬운 가격대의 물건을 출판 매체에서 보기 힘든 나라가 되었다. 미국의 <컨슈머 리포트>같은 잡지나 일본의 <비긴>같이 충실한 제품 카탈로그성 잡지는 한국에서 나오지 않는다. 분명 그게 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정보일 텐데, 사람들이 원하는 정보가 잡지라는 형태로 상품화되지 못하고 있다. 이야기하자면 아주 길지만 거칠게 요약하면 수요와 공급의 축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해 지금의 결과까지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잡지가 다루던 라이프스타일 이야기는 내 수요에 맞았을까? 별로 그렇지도 않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잡지가 제안하는 고가의 물품을 나는 한 개도 제대로 사기가 어려워서 늘 미묘하게 위축되어 있었다. 잡지는 화려한데 나는 초라해. 이에 대해 저자가 속시원하게 '속물적'이라는 단어를 써 주어 되려 놀랐다. 

  취향은 기본적으로 속물적인 지표다. 지금까지 예로 든 취향이 쌓이려면 가처분소득이라는 자원이 필요하다. 돈이 전부가 아니다. 취향을 쌓기 위해 가장 필요한 자원은 시간이다. 돈+시간+공부라는 개인의 자원을 열심히 지속적으로 집어넣어야 취향이라는 지적 아카이브를 쌓을 수 있다.

  잡지 에디터가 권하는 라이프스타일에 맞추기 위해 뱁새처럼 최대한 무리하던 때가 있었다. 에디터가 고른 취향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세련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인데, 이제사 돌아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일례로 저자는 해외의 벼룩시장을 꼭 가야 하는 곳이 아니라고 말한다. 흔하진 않지만 귀중하지도 않은 물건이 모인 곳이라면서. 사실 이 블로그에는 적다 만 비공개 글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어느 잡지 에디터가 쓴 유럽의 빈티지 마켓에 대한 책 리뷰다. 빈티지 마켓 관련 책을 읽고 벼룩시장에 대한 선망을 모락모락 키운 나는 유럽 여행을 가서도 당연히 벼룩시장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왜 내 눈에는 보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까. 여러 시장을 다녀왔지만 멋진 물건을 찾지는 못한 내가 또 빈티지 마켓에 대한 로망을 쓰려니 마음이 내키지 않았고 그렇게 책 리뷰를 미뤄둔 게 벌써 몇 년이 흘렀다(이러다 10년간 저장만 해두는 건 아닐지). 내가 감식안이 없었던 게 아니라 낡은 제품을 선호하지 않을 뿐이었다는 단순한 사실을 이제야 안다. 

 

  잡지의 판권사항도 읽어보는 열혈 독자였지만 그럼에도 모르는 존재였던 교정교열사와의 인터뷰도 아주 흥미로웠다. 프로페셔널의 기운이 팍팍 느껴지는 대화였지. 섭외 이야기나 섹스 칼럼 이야기도 흥미로웠고, 또 나를 자주 언짢게 하던 요소인 불필요한 외국어에 대해서도 신선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개념에 이름을 붙일 때의 어려움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해외의 자료나 개념으로 원고를 만들 때 외래어를 원어로 쓰느냐 마느냐는 둘째 문제다. 읽기 좋은 문장 모듬을 만드는 게 먼저다.

  하지만 나는 아직 '레드'와 '블랙'을 '빨강'과 '검정'으로 쓴 게 무슨 큰 문제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어쩌면 그 마지막 지점을 놓지 못하는 게 하이패션 잡지계가 줄어드는 이유는 아닐까. 작가는 종이 잡지 업계가 쇠하는 이유로 인터넷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사람은 여전히 읽는다. 여느 때보다 많이 읽는다. 스마트폰과 무제한 인터넷 요금제와 SNS 덕분이다. (중략) 사실 사람들은 정보를 접하기 위해 돈도 계속 쓴다. 잡지사나 언론사나 서점에게 쓰지 않을 뿐이다. 사람들은 이제 정보를 구매하기 위해 통신사에 돈을 낸다. 무제한 인터넷 요금제 말이다. 사람들이 책을 사지 않아도 통신사에 데이터요금을 내기 때문에 사람들이 즐길거리를 구매하는 비용 자체는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온라인을 통해 어느때보다 활발히 의견을 표현하고 취향을 찾아가기가 쉬운 지금, 매니아 2000명만 모으면 먹고 살기는 어렵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실제로 구독자 2~3만 명 규모의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활발히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 그 말에 납득이 간다. 그래서일까, 나는 내가 대학생일 때보다 내 취향에 맞는 라이프스타일 잡지가 굉장히 많이 늘어났다고 느낀다. 당장 오늘도 '쓸'이라는 제로웨이스트 관련 잡지를 샀고, 매거진B도 많이 구입했단 말이지. 브로드컬리 잡지는 몇 권을 연달아 읽었다. 그렇다면 결국 콘텐츠의 문제다. 

  봉소형 교열가의 인터뷰에서 기억나는 에디터로 언급된 '김지수 부장님'은 나도 굉장히 좋아한다. 여배우들에서 잠깐 나왔을 때부터 그 포스에 감탄했는데 그분이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이라는 책의 그 인터뷰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더 좋았다. '김지수의 인터스텔라'가 새로 뜰 때면 매번 열심히 읽는 애독자인 나로써는 이런 내용이 꽉꽉 차 있는 잡지에 나오기만을 오매불망 바라고 있다. 하지만 기존의 메이저 잡지에는 어느 연예인의 심경고백이나 살 수 없는 물건만 나온단 말이야. 결국 패션 잡지는 이제 수많은 대중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하이패션을 사랑하는 소수의 매니아층을 위한 매체로 바뀔 수밖에 없다. 어쩌면 소수의 취향을 다수에게 진리인양 말할 수 있었던 과거가 잘못된 때였을지도 모르겠다. 에디터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이 독자로써 더 행복하거든.

  잡지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담담하면서도 시크하게 털어놓는 문체가 멋있는 책이었다. 내내 시크했으면서 브런치에 어느 대학생이 달았다가 지운 댓글을 기억했다는 작가의 마지막 이야기에 인간적 따뜻함까지 더해지니 더욱 좋았다. 잡지 에디터를 선망하는 이 도시의 누군가가 또 이 책을 집어 들리라 생각해 본다.

 

메인에 올라갔다. 재밌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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