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총결산 시리즈] 2020년 월별 정리

  20대를 돌아보면 매년 키워드나 성취한 일이 생각나곤 하는데, 대체 2020년은 딱 떠오르는 게 없다(코로나는 나만의 키워드가 아니라서 제외한다). 아무 성장도 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를 썼던 한 해라고 해야 할까. 그만하면 이 힘든 시기에 성공인지도 모른다.

 

1월

  어느 날 일어났는데 배 아래쪽이 너무 아파 식은땀이 났다. 처음 아파보는 부위라 곰곰이 생각해보니 거기에 자궁이 있겠더라고. 주변에 수소문을 해보고 산부인과에 갔는데 자궁에 혹이 있다고 했다. 선생님은 위험해 보이지 않는 데다 자연스럽게 소멸될 수도 있으니 지켜보자 했지만 내 마음은 이미 구만리로 떠났지. 세상에, 건강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구나. 너무도 당연한 일을 겪고 깜짝 놀라 건강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됐다. 올해 사주에 몸에 칼을 댈 운이 있다던데, 수술하면 어떡해!

 

2월

  내가 쓴 책 리뷰가 다음 메인에 올랐다. 수백명이 밀려들어와서 처음에 정말 깜짝 놀랐다. 다음 어플도 없어서 내 글이 메인 어디에 있는지 찾는데 한참이 걸렸다. 몇 개월 간 꾸준히 메인에 오르면서 슥삭슥삭 글 찾는 스킬도 늘고 메인에 오르기를 기대하며 글 쓰는 맛도 좋았다. 리뷰만큼이나 일상 글에도 공을 들이는데 일상 글로는 메인을 전혀 가지 못한다는 점은 아쉽다. 내년에는 일상 글로도 멋지게 대문을 탈환할 수 있기를. 그러려면 브런치로 넘어가야 하나?

  상반기에 5km 마라톤을 해보겠다며 나름 헬스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었는데 중국에서 흉흉한 전염병이 돈다는 소문을 들었다. 유튜브 괴담 정도로 애써 믿었지만 소용 없었지. 코로나가 점점 현실이 되고, 어느새 마스크를 끼지 않고는 공공장소에 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어떻게 전염되는지도 전혀 알 수 없던 코로나 초기의 불안감은 극도로 심각하게 나를 괴롭혔다. 한 번은 목감기가 왔는데 코로나일까 봐 사무실에 들어갈 수가 없더라고. 급히 이비인후과에 갔더니 선생님이 아무렇지 않게 목구멍을 들여다보시기에 마음을 놓았다. 이때만 해도 비일상이라고, 막연히 금방 괜찮아지리라 생각했던 것도 같다.

 

3월

  코로나가 계속 이어지면서 회사와 집을 제외하고는 아무 데도 가지 않는 생활이 시작됐다. 가장 심각한 타격은 운동을 갈 수 없게 된 것. 가계에 위험이 생기지 않아 다행이라 여기며 매일 저녁 가족이 일찍 모여 집콕 생활을 했다.

  운동을 안해서였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10대 초반 월경을 시작한 이래로 처음 월경을 건너뛰었다. 혹 때문인지 뭔지 얼마나 벌벌 떨었나 몰라. 연말인 지금은 코로나 등등으로 나름 스트레스를 받았겠구나 추측하는데 그 당시에는 대체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오만 생각을 했다. 월경은 안 하는데 통증은 이어졌다.

  회사 동기 중 처음으로 승진하는 사람이 나왔다.라고 말하기에는 열 명 중 다섯은 승진하는 대규모 승진이었다. 나는 승진하지 못한 나머지에 들었는데, 살면서 평균 이하의 점수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는 패배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동기들 중 사이가 틀어지는 사람이 생겼고 서로 눈치를 봤다. 2019년 연말에 모여 다 같이 신나게 게임을 했던 게 우리의 40년 근무 중 마지막 단체 모임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언니는 결혼을 선언했다. 사귄 지 2년이 넘은 데다 결혼 적령기이니 깜짝 놀랄 일은 아니었다. 언니의 결혼에 눈물을 흘린다는 여느 동생들과는 달리 나는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언니의 결혼보다 언니를 결혼시키는 부모님이 늙어간다는 당연한 사실이 걱정됐다면 좀 이상한가? 형부가 나보다 쪼끔 늦게 태어나서 용돈을 받기는 틀렸다는 생각을 했다(아, 커프 이후로 몇 년을 키워온 나의 로망인가). 그래도 이제까지 내가 본 언니의 남자친구 중 가장 마음에 들어서 언니 편을 들어주었다.

 

4월

  코로나는 끝날 듯 끝나지 않아서 코로나블루에 절로 걸리게 했다. 4월에는 체감하는 몸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았다. 월경을 한 달 뛰어넘어서 그런지 정말 자주 자궁이 아프더라고. 4월 이후로 매달 배란통이 생긴 점도 영 반갑지 않다. 몸이 엉망인 데다 운동도 갈 수 없어 일상 루틴이 와르르 무너졌고, 마음도 무너져서 남자친구와도 (나만의) 위기를 맞았다. 내 위기이니 내 방식대로 위기를 넘기고자 남자친구에게 두 달 치 빡빡한 공부 계획을 세워주었다. 나중에 들으니 남자친구 부모님도 그 계획을 보고 좋아하셨다고. 이 시기 이후로는 남자친구에게 굳이 계획을 대신 세워주지 않는다. 남자친구가 이미 스스로 빡빡하게 공부하는 데다 스스로 스트레스도 가득이고, 또 나도 적당히 물러서야 함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내 스트레스에 비해 그의 스트레스가 적어 보여 성에 차지 않았다면, 상황이 역전되고는 그저 안쓰러운 마음만 가득해졌다.

  집에 오래 있으니 미니멀리즘에 대한 욕구가 꾸준히 샘솟아서 처음으로 당근마켓에 가입해 보았다. 중고거래 자체를 거의 해본 적이 없던 터라 좀 무서웠지만 근거리의 주민과 대면거래를 하니 사기당할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방 안의 가득한 잡동사니를 정리해보자! 그래, 이게 당근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5월

  나라에 코로나가 다시 활발해졌다. 금방 헬스를 다시 할 수 있을 거란 3월 초의 순진한 기대는 멀리 날아갔지. 홈트를 시작하려 꿈지럭댔지만 그다지 자주 하지는 못했고, 대신 집 정리와 당근마켓에 미친 듯이 빠져들었다.

  작은 소품이나 물건을 사기 좋아하는 편이라 팔 물건이 정말 많았다. 거래를 하는 장소를 정해두고 하루에 여러 명과 거래해보기도 하고, 팔기는 어렵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멀쩡한 물건을 적극적으로 무료 나눔 하기도 했다(대표 물건: 고등학생 시절 사용한 사물함 자물쇠). 착착 물건을 치워가는 나를 보고 가족들이 대리 판매를 요청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 장난으로 커미션은 50%라고 외쳤다가 어쩐지 그대로 정착해서 제법 수입에 도움이 되었다. 모두들 직접 연락하긴 귀찮다고 기꺼이 커미션을 내더라고. 집도 정리하고 돈도 벌고. 단조로운 삶에 꽤 괜찮은 활력소였다.

 

6월

  남자친구가 준비하던 공기업 시험에서 떨어졌다. 커트라인에서 한 두 문제 정도 차이로 낙방. ‘00까지 적당한 직장에 자리잡지 못하면 헤어지겠다’는 엄포는 더 이상 놓을 수 없었다. 천성이 느긋한 네게 압박감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러기도 전에 넌 이미 너무 힘들었거든. 실제로 헤어질 자신도 전혀 없었다. 마음이 다친 너에게 내가 충분한 위로가 되는지 걱정이 됐다.

  건강 보험을 가입했다. 회사에서 단체 실비보험을 들어준다는 이유로 개인 보험이 단 하나도 없었던 터라 이제는 하나쯤 마련할 때가 되었더랬다. 아직 나이가 가능해서 어린이보험으로 들었는데, 대단한 수준이라기보다는 어느 날 아프면 약간의 도움이 될 정도로 들었다. 보험도 사람마다 생각이 천차만별이지만 난 보험 대신 스스로 저축한다는 종류의 사람인지라. 후회하려나?

  참다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필라테스에 다시 나갔다. KF94를 끼고 쌕쌕 대노라면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기분이었지만 사람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아! 억지로 견디다보니 결국 마스크를 쓰고도 무리 없이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운동하는 공간 자체의 환기가 좀 미심쩍긴 했지만 글쎄, 일단 내 몸이 너무 괴로워서 나갔다. 어찌나 좋던지. 상쾌했다.

  언니의 남자친구가 집에 인사를 하러 오기 전에 나와 먼저 만났다. 우직하고 듬직한 사람이었고 먹성도 좋았다(알아봐 주지 못해 미안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묘하게 아빠랑 비슷한 성격을 발견하게 되는데, 언니는 내가 언급하기 전엔 미처 몰랐다고 한다. 인상이 나쁘지 않아서 친해지면 잘 지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프게도 아직 말은 놓지 못했다. 낯가리는 사람들 같으니라고.

 

7월

  힘든 일을 겪은 친구를 위로한다는 핑계로 전주에 당일치기 여행을 갔다. 코로나 코로나!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다고요! 신나게 돌며 먹었는데 사람으로 꽉 차야 할 가게가 코로나 때문인지 전주 유행이 지났기 때문인지 한산한 모습을 보며 마음이 착잡했다. 좋은 친구들 덕분에 이제 전주 트라우마는 완벽히 극복했다고 생각하고... 트라우마고 자시고 이번에 가서 보니 내가 알던 공사판과 허허벌판이 전부 다 천지개벽을 했더만. 그때 집 한 채 안 사고 뭐했냐! 이때 우리가 굳이 전주로 간 이유는 전주의 어느 작은 절에서 사주를 보기 위함이었는데, 인자한 스님 덕분에 수원에서 본 사주에서 매였던 마음을 풀었다. 인생은 내가 결정한다. 암암.

  미니멀라이프 카페에 가입했다. 짐을 줄이다 보니 정돈보다는 짐을 줄인다는 그 자체에 집착하는 기분이 들어 무언가 틀렸다는 생각을 했다. 미라 카페에는 고수가 가득해서 진정 미니멀리즘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약간 맘카페 연령대의 구성원이 대부분이지만 친목을 절대 금지하는 데다 미니멀라이프와 관련 없는 이야기는 전혀 할 수 없어 아주 마음에 든다. 아주 간결해! 미니멀 정신에 딱 맞는 그룹이다.

  7월 말에도 승진이 있었고, 같은 직렬에서 한 명의 동기가 승진을 했다. 지난번에는 평균 이하라 충격이었다면 이번에는 내가 중간도 아닌 꼴찌 그룹이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흔들렸다. 조직 내에서 내 위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고, 나에 대한 평가를 조직에 맡기지 말자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쉽지 않았지만.

 

8월 

  언니의 결혼 준비를 돕게 되어 드레스샵 고르는 일을 함께했다. 드레스 입은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남자친구의 안목과 그림 솜씨를 믿을 수 없다나. 특유의 공주님 분위기가 싫어서 결혼 문화를 좋아하지 않는데 정말 언니가 하나니까 참고 따라갔다. 언니는 열 벌 가량의 드레스를 입었고, 어느 드레스샵을 선택했고, 나는 드레스는 참으로 몸의 단점을 잘 부각해주는 옷임을 알게 됐다. 저러니 신부들이 시술을 받지 안 받아. 언니는 어마어마한 다이어트를 힘내서 하고 있다.

  채팅방을 착각해 언니에게 보내야 할 카톡 메시지를 회사 단톡방(서른 명쯤 입장)에 올렸다. 1초 만에 지웠지만 소문은 기관장에게까지 흘러 나는 업무 시간에 딴생각만 하는 대역 죄인이 되었다. 비속어를 쓴 것도 회사 욕을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모멸감을 줘야 했는지 여전히 의문이지만 내 의문 따위는 아무 데도 쓸 데가 없다. 경위서를 쓰는 것으로 일이 마무리되었는데, 덕분에(?) 승진 순서에 대한 반발심이 자학으로 사그라들었다. 이 모든 걸 어르신들은 모두 예상하고 날 뒤로 밀어둔 게 아닐까. 승진 못해도 싸다 싸. 나를 위해 너무나 애써준 상사 때문에 끝까지 참고 또 참았다. 나는 직원을 위해 저렇게 희생할 수 있을까. 죄송합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 운동을 다시 포기하고 집콕 및 홈트 모드로 돌아섰다. 필라테스 학원에서 매트도 공구해 나름 홈트 채비를 꾸렸지. 만인의 홈트 동반자 땅끄부부, 내가 좋아하는 스미홈트, 스트레칭 맛집 다노, 딩고 등 여러 채널을 넘나들며 동작을 따라 했다. 뭔가 충분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루틴을 겨우 만들기 시작했다.

  집콕을 더욱 길게 만든 건 비 때문이었다. 비도 오는데 어딜 가. 나라 전체에 폭우와 장마가 이어졌다. 이상기후는 무서워. 코로나 덕에 대중교통에 사람이 적어 일상의 쾌적함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환경 걱정에 마음이 짓눌렸다. 나는 운이 좋아서 폭우 피해가 없는 도시에 살고 있는 거야. 순식간에 산사태가 밀려오거나 물이 차오르는 영상을 보면 겁에 질렸고 10년 후에는 그나마 지금의 기후를 그리워할 거라는 글에 초조해졌다. 어떻게 해야 환경오염을 멈출 수 있나. 일회용품을 최대한 줄이고 빨대와 함께 다회용 젓가락을 반드시 상비하기 시작했다.

  몇 달간 그렇게나 즐겨 했던 당근마켓 거래를 그만두었다. 악기 거래를 하다 상대방의 태도에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날 실외에서 열어서 확인을 하더니 무어라 트집을 잡았고, 그럼 사시지 않아도 된다 했더니 굳이 사갔고, 자기가 그 악기를 사는 이유를 말했는데 내가 악기를 잘 아는 이에게 따로 물어보니 보통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답을 들었고, 그럼에도 돈을 받았으니 잊자 했는데 며칠 이따가 구매 취소를 하고 싶단 연락이 왔다. 어이가 없어서 그 계정을 찾아보니 이미 자기 매물로 올렸더라고? 몇 시간 올려봤는데 안 팔렸나 보지? 중고 거래에 누가 며칠씩 물건을 가져갔다가 돌려주냐며(심지어 그 며칠만 필요해서 사간 분이었다) 연락하지 말라한 뒤 모든 자료를 캡처하고 차단했다. 그러고 나니 그냥 중고 거래 약속을 잡기가 싫더라고. 올려뒀던 매물을 모두 숨기고 당근 칩거기에 진입했다.

 

 

9월

  8월에 일주일 간 집에 있게 되어 그참저참 집안의 쓰지 않는 가구를 버렸다. 베란다를 뒤엎고 컴퓨터방(a.k.a. 창고방)을 정리하고. 그리고 9월이 되어 숙원사업이던 옷장 옮기기를 실천했다(엄마가 덥다고 8월에는 옮기기를 거부했다). 내 방에는 1m짜리 옷장이 두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옮기기 위해 가족 4명이 달라붙었다. 문 앞쪽 벽지가 찢어지고 온 몸이 아팠지만 어쨌거나 옮겨내서 방이 거대해졌다. 10년 넘게 쓴 방이 이렇게 새로워서야, 너무 좋았다.

  코로나로 홈트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주춤대던 내게 생각의 변화를 줄 인터뷰를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인터뷰 시리즈 ‘김지수의 인터스텔라’에 이재갑 교수가 출연했는데, 이 교수는 코로나가 한 달이면 지나갈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아예 2~3년이 소요된다 생각하며 체념을 하고 일상을 바꾸라 했다. 맞네. 내가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구나. 생각을 바꾸는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코로나 시국에 걸맞은, 그러면서도 평생 유용할 습관을 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아침 운동. 아침에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땀을 흘리며 20~30분 정도의 영상을 따라 했다. 운동보다도 눈을 뜨는 게 더 힘들었지만 함께 아침운동을 하기로 한 동기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억지로 매일 일어났다. 서로 마찬가지였겠지.

 

10월

  여름에 사주를 본 스님이 가장 자신 있게 말한 내 하반기 변화가 승진이었다. 맞았네요. 승진을 했는데 어쩐지 맥이 탁 풀렸다. 이때였나요. 내심 포기하지 못했던 회사 내 위치에 대한 미련을 정말 놓게 된 때가. 내 자존심의 영역에서 회사라는 평가 요소는 사라졌다. 이깟 두 글자 바꾸자고 내 마음을 그렇게나 썼구나. 이번에도 승진하지 못한 동기에게 많이 미안했다.

  회사에서 의욕을 잃으니 생활에도 의욕을 잃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긴 했지만 어쩐지 운동량이 자꾸 줄었고, 몸무게는 차곡차곡 적립되었다. 건강한 돼지가 되어갔지! 건강한 김에 용기를 내서 산부인과 검진을 갔더니 와우! 혹이 없어졌다며 이리 보나 저리 보나 건강하다고 했다. 근심은 이제 그만.

  2년 만에 건강검진을 했다. 몸무게는 늘었지만 여러모로 수치도 좋아지고(원래도 정상 범주를 벗어나진 않았지만 어쩐지 대체로 조금 낮아져서 만족했다) 허리 둘레도 많이 줄고, 건강한 돼지가 되었다고 내심 만족했는데… 그랬는데… 집으로 온 등기를 먼저 뜯어본 엄마는 몇 년 만에 본 딸의 몸무게에 심각한 충격을 받고 내가 퇴근하기도 전에 내 PT를 끊어주기로 결정했다. 일주일에 6일 이상 가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빠지는 날*2만 원)만큼 벌금을 내야 한다고. PT값이 제법 비싸다 보니 늘 하고 싶으면서도 못했는데 기회는 이때다 싶어 얼른 동의했다. 덕분에 11월 2일부터 25회의 PT를 받게 되었다.

 

11월

  언니의 상견례를 위해 온 가족이 여수로 내려갔다. 결혼을 서울에서 하니 상견례는 내려가 드려야지. 엄마가 상견례 때 입을 옷을 고르기 위해 며칠이 걸렸는데 결과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웠다. 상견례 자리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나와도 영 불편해서 여러 번 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다.

  상견례를 하고 온 다음주에는 친구들과 제주도 여행을 갔다. 코로나가 약간 잠잠해졌고, 친구가 퇴사를 한 뒤 제주도에 오래 혼자 여행을 하고 있어 잠시 들르는 식으로 했다. 언제나 죽이 잘 맞는 아이들이니 여행의 모든 요소가 즐거웠지만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한라산 등반이었다.  셋이 아주 걱정의 시나리오를 쓰고 또 썼어도 결국 잘 올랐다. 친구와 떨어져 혼자 걸으면서 악착같이 한걸음만 더 가자는 마음을 먹었는데, 돌아보니 그때의 내가 너무 좋아서 (원래는 찍지도 않겠다 했었던) 정상석과 찍은 사진을 핸드폰 배경으로 설정했다. 하고 보니 등산 사진을 프사로 해둔 어머님 같은 기분이었지만.

  엄마가 원조해준 PT는 아주 순조롭게 흘러갔다. 워낙 살이 쪄 있었고 또 급하게 찐 살이었던지라 한 달 만에 4kg이 훌쩍 빠졌다. 한 달 만에 4kg이 훌쩍 찔 수 있는 몸인 건 이미 알았는데. 생각보다 덜 힘겹게 살이 빠져 다행이었다. 다만 그다음부터는 그만한 속도가 나오지 않을 것을 예상해 너무 신나지 않고자 혼자서 애썼다. 선생님은 나보다 어린 청년인데 내가 힘들어할수록 좋아하고 무게를 늘리는 건 잘해주면서 줄이는 건 해주지 않았다. 악착같이 따라가긴 했는데 PT 다음날 입술에 수포가 생긴 적도 있다. 휴. 일단 잘 빠지긴 하니까. 25회가 끝나면 추가 등록을 할까 고려 중이다.

 

12월

  갑자기 집이 사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치솟는 집값의 끄트머리라도 잡아보고 싶은 마음이었지. 마침 눈여겨보던 아파트의 괜찮은 층에 매물이 나온 걸 발견하고 마음이 두근거렸다. 구매를 해서 전세가 이만큼, 대출을 이만큼, 현금을 이만큼.. 이리저리 고민해서 엄마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돌아온 카톡은 단호한 '반대' 뿐이었다. 시무룩해져서 마음을 접었는데 그 매물은 1주일 새 7억에서 7억 2천으로 올랐다(그 이후에는 차마 가격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지). 그 집 자체에 대한 욕심보다 치솟는 집값에 대한 두려움이 갑자기 밀려들어왔던 시기였는데 단념한 이후 1주일 정도 찬찬히 여러 부동산 공부를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어쨌거나 집은 '이 집이 왜 다른 지역의 집보다 메리트가 있는지' 스스로 설명할 수 있을 때 사야 하는 법. 직장에 가깝고 쾌적하게 살기 적당한 집을 평소에 많이 눈여겨두어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다이어트와 근육 늘리기에 한창 재미가 들렸을 때 수도권 2.5단계로 인해 헬스클럽 운영이 중단되었다. 운동도 운동이지만 헬스장에 생계가 걸려있는 사람들과 친절한 PT 선생님이 걱정됐다. 28일에 만나자고 인사했는데 1월에도 언제쯤 만날 수 있을 지 예측조차 안 되는 지금, 식단 관리도 무너지고 운동도 등한시하고 있지만 선생님을 만날 날을 생각하며 1월에는 홈트를 다시 해보자고 다짐해본다.

  남자친구가 꽤 괜찮은 회사의 어느 자리로 들어갔다. 정규직 전환이 될 자리이지만 되는 그 순간까지 마음을 놓아선 안되겠지. 이 코로나 시국에 어디엔가 정착한 남자친구가 자랑스럽다. 이리 되기까지 얼마나 혼자 노력했을지 뻔히 알기에 마구마구 칭찬과 응원을 날렸다. 너는 멈추었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1월 1일을 기준으로 새로운 부서로 발령이 났다. 기존에 일해보고 싶은 부서였고 구성원도 다 좋아보여서 발령 자체에 대한 만족도는 굉장히 좋다. 심지어 자리까지 호사스러워! 하지만 한 번도 사용해본 적 없던 시스템을 능숙하게 쓸 줄 알아야 하는 데다 한자도 잘 읽어야 해서 제발 2021년의 내가 뇌를 많이 사용하기를, 스펀지처럼 업무를 흡수해내기를 기대하는 바. 아무래도 으쌰 으쌰 부스터 모드를 풀가동 하려 한다. 신년에도 지루하진 않겠어. 새로운 도전이 두렵고도 반가운 연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