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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마켓으로 꺼내보는 수능 이야기

by 푸휴푸퓨 2020.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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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원하면 죽을 생각으로 해봐야지

 

 

 


 

  당근마켓을 거의 하지 않지만 계정을 폭파하지는 않아서 일단 올려두고 몇 달이 지나건 세월아 네월아 놔두는 물건이 몇 개 있다. 눈에 띄어서 갑자기 사는 게 아니라 혹시 있을까 찾아볼만한 것들. 예를 들어 만년필 잉크나 독립출판물이 그런데, 코로나로 반값택배 거래만 하겠다는 오래된 글을 굳이 눌러 채팅을 건 상대방은 평균 이상으로 예의 바르고 친절하다. 가격을 깎지도 않는다.

  지난 달 그런 거래 중 하나를 했다. 젊은 여자인 듯 느껴지는 상대방은 유난히도 부드러워서 기분은 좋았지만 어쩐지 험난한 세상인데 걱정이 됐다. 이렇게 착하게 말하다가 나쁜 상대를 만나면 마음이 상할 텐데. 나는 괜한 오지랖을 털어내며 열심히 물건을 팔았고, 거래 후기가 오거나 말거나 이내 잊어버렸다.

  출근길에 몇 주 전 거래의 리뷰가 등록되었다는 알람이 떴다.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는데 곧 채팅도 왔다. 수험생이어서 물건 수령이 늦었다며 늦어서 죄송하고 좋은 물건에 감사하다고 했다. 어이쿠, 어쩐지 말이 곱더라. 수험생이었다는 말에 마음이 동해서 고생 많았다고, 홀가분하고 편안하게 12월 잘 보내라는 답장을 했다. 금방 따뜻한 말에 위로가 됐다며 감사하다는 답이 또 왔다. 맞아. 수험생은 감동받기 쉽지. 귀여운 채팅을 보면서 내 수험생활을 떠올렸다. 오래간만에.

 


 

  고3이 되고는 매달 모의고사를 봤다. 늘 일정한 점수를 유지해서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초조해 하지 않고 수능을 봤는데 하, 1년 동안 친 시험 중에 수능 점수가 가장 낮았다. 전과목 모두 평소보다 한 문제쯤 더 틀렸다고나 할까. 망쳤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한데 모으니 한숨이 나왔다. 총합 20점이 떨어지다니, 못봐주겠는데.

  3월 초 처음 배치표를 보며 대강 3개의 과를 선택해 두었다. 점수에 맞는 곳 두 개, 안전장치 하나. 막상 수능 점수를 받고 보니 안전장치가 아니라 겨우 갈지도 모를 과가 된 곳에 원서를 썼다. 재수는 안돼. 고3 내내 기계처럼 공부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내게 그걸 다시 반복할 기력은 없었다. 다군에 점수보다 한참 낮은 어느 학교를 썼다. 가족에게 재수는 없다고 선언했다.

  우선선발에서 모두 떨어지고 나자 나는 심각하게 예민해졌다. 어느날은 엄마가 오랜 친구와 통화를 하던 중이었는데, 고등학생 아들이 있어 입시 전형을 설명해준다는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당장 전화를 끊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한테 이럴 수는 없잖아. 좋아하던 물건을 선물 받아도 못 보던 예능프로그램을 봐도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세상이 끔찍했다. 수험생 때도 관리하며 찌우지 않았던 살이 금세 불어 5kg가 늘었다.

  결국 원하던 대학에 와서 학과 공부가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을 때도 나는 가끔 자책을 했다. 다른 학과나 학교에 가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더 나은 점수만은 갖고 싶었다. 왜 나는 더 잘할 수 없었을까? 내가 충분히 열심히 하지 않았나? 더 이상은 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그러다 2012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온 어느 유도 선수의 말을 들었다. 가슴에 박혔다.

4년 전에는 죽기 살기로 해서 졌어요, 그때는. 지금은 죽기로 해서 이겼어요, 그게 답입니다.

- 김재범, 2012 런던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고3 시절 나는 종종 ‘죽기 직전까지 하고 있다’는 말을 입에 올리곤 했다. 김재범 선수의 말이랑 이렇게 찰떡같이 달라붙을지 그땐 몰랐다. 왜 직전까지 했나. 죽을 때까지 했어야지. 누군가는 어떤 일을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수능에서의 분함이 풀렸다. 그제서야 내가 끝까지 공부에 양보할 수 없었던 수면 시간, 산책 시간이 생각나서 웃었다. 조금 더 포기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몰라.

 


 

  깨달음을 얻고 삶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하는 집념의 성공 수기를 이어가면 좋겠지만 난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고3 시절 이후로 그때만큼 무언가를 위해 열심히 달리거나 큰 성취를 일궈내는 일은 없었다. 다만 나는 그저 내 최선 위에 한 단계 더 최선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됐다. 내게 가장 좋은 결과가 돌아오지 않아도 어디엔가 나보다 더 죽겠다는 마음으로 노력한 사람이 있겠거니 하는 마음을 늘 품게 되었다는, 결과에 빨리 수긍하고 억울해하지 않는 태도, 뭐 그런 것.

  한 단계 위를 모르는 삶과 아는 삶은 천지차이다. 회복탄력성이 좋아졌다 해야 할지 투지가 사라졌다 해야할지 모를 일이라 나사 빠진 나를 보며 아빠는 가끔 아쉬워하곤 한다. 그치만 긴장을 한 숨 놓은 사람이 되어 사는 게 확실히 편해진 나는 변화가 마음에 든다. 언젠가 또 미친 듯이 갈구할 일이 생기면 그땐 죽어도 좋겠다며 달려들어야지. 괴로웠던 수능이 내게 남긴 건 이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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