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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感 part.2 - 시각

by 푸휴푸퓨 2021.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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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정에서 출판 학교를 다니던 2016년, 상상마당에서 장 자크 쌍뻬의 원화전이 열렸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작가의 원화전을 이렇게나 가까이서 보러 갈 수 있다니! 평일 오전에 느긋하게 보러 간 전시는 지금까지 본 전시 중 가장 만족스러웠다. 공간 전체를 혼자 독점하다시피 했는데, 쌍뻬의 그림과 여유로운 분위기가 잘 어울려서 둥둥 유영하듯 구경을 했다. 도저히 그냥 나올 수 없었던 나는 어디에 붙여야 할지도 모른 채 A2 사이즈의 큰 포스터를 샀다. 

  쌍뻬 특유의 묘한 여유가 좋아서 산 그림이었다. 혹시나 구겨질까 하루종일 부둥켜안고 보호하며 집에 들고 갔지. 이 그림은 전주에서도 서울에서도 수많은 인테리어 소품 중 가장 아끼는 물건이 되었다. 벽 중앙에 붙이고 매일 쳐다봤는데, 그림에서는 언제나 여름밤의 냄새가 났다. 어쩐지 한국보다 더 자유로운 외국의 여름밤 냄새가.

 

 

  서울에서의 일상에 적응한 뒤 오래 고민하다 올리브색 알루미늄 액자를 샀다. 어차피 인쇄된 그림이지만 그래도 먼지가 쌓이고 주름이 지는 게 안타까웠다. 그렇게나 크고 비싼 액자를 사본 적은 처음이어서 포스터 값보다 액자 값이 더 비쌌다. 뭐 어때, 그림과 액자가 정말이지 잘 어울려서 이전보다 훨씬 소중한 물건이 되었다.

  어느날 인터넷에서 실학파에 대한 글을 읽다가, 박종채가 아버지 연암 박지원을 추억하며 지은 '과정록(過庭錄)'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발견했다. 뭐야. 조선판 뉴요커야?

  금사(琴師) 김억(金檍)이란 이가 있었다. 풍무자(風舞子)라는 호는 교교재 김용겸이 붙여준 것이었다. 새로 연주하게 된 양금을 좋아해서 담헌의 집에 모였다. 밤은 고요한데 음악 소리가 일어났다. 교교재께서 달빛을 따라 약속도 없이 왔다가, 생황과 양금이 번갈아 가며 연주되는 것을 듣고 너무도 즐거워, 책상 위에 놓인 구리쟁반을 두드리면서 장단을 맞추셨다. 《시경》 〈벌목(伐木)〉장을 외우니 흥취가 도도하였다.
  이윽고 교교공이 일어나 방문을 나가시더니, 한참 지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가 살펴봐도 공은 보이지 않았다. 담헌이 선군께 말씀하셨다. “우리가 예의를 잃어 어른을 돌아가시게 했을까 염려되네.” 마침내 함께 달빛 아래로 걸어서 교교공의 댁으로 향하였다. 수표교에 이르니, 그때 마침 큰 눈이 갓 개여 달빛이 더욱 환했다. 공은 무릎에 금(琴)을 빗겨 얹고, 두건을 벗은 채 다리 위에 앉아 달빛을 바라보고 계셨다. 모두들 놀라 기뻐하며, 술상과 악기를 옮겨와 펼쳐놓고 공을 모시고서 노닐며 즐거움을 다 한 뒤에야 파하였다. 선군께서는 일찍이 이 말을 하시면서 말씀하셨다. “교교공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다시 이처럼 운치있는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정민, "미쳐야 미친다" '실내악이 있는 풍경' 中, 블로그 Raphaella에서 2차 발췌

 

  이 이야기를 읽고 나서 그림을 볼때면 문득 악기를 들고 친구를 찾아간 남자의 이야기를 상상해본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매너리즘에 빠져있다가, 어릴 적 불던 자그마한 악기를 들고 친구를 찾아가서, 달빛 아래서 합주를 하며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던가 하는 아무 생각(일본 영화 '굿바이'의 일부를 표절한 상상으로 그 영화에서도 악기 연주 장면이 마음의 평온을 준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외국의 여름밤이건 조선의 여름밤이건 운치 있고 평안한 마음만은 같아서 여전히 매일 감탄하며 산다. 그림도 액자도 이것보다 더 좋아할 물건을 찾을 수 있을까. 눈 마주칠 때마다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 있어 사는 게 제법 감칠맛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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