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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MOVIE

[Movie Review] 도시인처럼(Pretend It's a City)

by 푸휴푸퓨 2021.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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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는 내가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된 것은 봉준호 감독의 수상소감 때문이었다. 영민한 봉준호 감독이 그를 치켜세운 덕에 거장은 눈물을 글썽였고 미국인은 봉 감독의 매력에 더욱 빠져들었다고. 영화에 우매한 나만 '아, 마틴 스콜세이지라는 사람이 유명한 사람이로구먼' 하고 넘어갔다. 이동진이 언급했던 이름 같기도 하네(안 했을 리 없지).

  그런 그가 어느 여자 작가와 넷플릭스에서 다큐 시리즈를 찍었다기에 호기심이 일었다. 넷플릭스 다큐를 꽤 좋아하는 편인데 감독까지 흥미롭다니. 다큐 내내 스콜세이지 감독은 오로지 웃는 진행자 역할이었지만 이만큼 개성적인 작가와 잘 지내는 사이라면 영화도 볼만할 성 싶겠다는 느낌이었다(거장이라는데 오만한 말인 듯 하지만 현재 나는 프랜 레보위츠의 말투에 감화된 상태이므로 적당히 넘겨주기 바란다). 하루만에 후루룩 다큐멘터리 전 편을 봤다.

도시인처럼 (출처: 넷플릭스)

  프랜 레보위츠(Fran Lebowitz)는 1950년에 태어나 젊은 시절 뉴욕으로 이주해 쭉 뉴요커로 살았다. 고등학생 시절 박준 작가의 '뉴욕, 뉴요커(당시에는 제목이 달랐지만 지금은 이렇다)'라는 책을 읽고 또 읽으며 뉴욕에 대한 환상을 키웠는데, 그 책에 묘사된 전형적인 뉴요커의 특징을 레보위츠는 그대로 지니고 있다. 지나치게 솔직해서 듣는 이가 공격적이거나 무례하다 생각할 수도 있을 만한 수준이다. 거칠고 찌르는 말투지만 그것은 위악을 떨거나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다른 지역에서는 평범할 일상이 뉴욕에서는 하나하나 전투이기에, 전투를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에서 길러진 태도일 뿐이다(전투 비유가 뉴요커 사이에서 흔한 이야기인지 심지어 레보위츠도 다큐 안에서 직접 언급한다). 게다가 뉴욕이 지독하다고 끝없이 툴툴대면서도 다른 곳으로 떠날 생각이 전혀 없다. 뉴욕에 놀러가도 진짜 뉴요커를 만나기 쉽지 않은데 멀리서나마 이런 뉴요커를 구경하게 되어 기쁜 마음까지 들었다.

  7편의 짧은 다큐(이자 크게는 한 개의 인터뷰) 내내 레보위츠는 시크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시각을 보여주는 멘트를 많이 날렸다. 너무 많이 날려서 기록하기를 포기하다 그중에 특히 정신이 번뜩 들게 한 말이 있어 굳이 남긴다. 평소 말이 통하지 않고 시끄러워 어린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나의 주장에 대한 카운터 펀치와도 같은 말이었다. 내가 아마도 레보위츠가 말하는 지겨운 이야기를 할 지겨운 어른이겠지. 

Q. 어린 친구들과 잘 지내시나요?
A. 상황에 따라서요. 꼬마들은 무척 좋아해요. 그 질문은 아니었겠지만요.
사람들이 항상 놀라죠. 아이들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가장 성가시지 않은 무리여서 아이들이 좋아요.
다들 아이들이 성가시다고 하죠. 귀찮고 시끄럽다고요.
하지만 꼬마들이야말로 이미 지겹게 들은 똑같은 얘기를 하지 않을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들이에요.
아직은 뻔한 생각으로 꽉 차지 않았다고요. 그래서 어른보다 독창적이죠.
물론 그런 면이 빨리 사라지긴 하지만요.

  이 까칠한 여자의 독한 입담을 사람들이 굳이 찾아와 듣는 것은,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말 속에 끊임없이 유머가 녹아있고 또 옳은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지독한 자기 객관화와 달라이 라마라도 뉴욕 지하철을 타면 화가 나리란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지 않을 사람은 몇 없을 것 같다(최소한 처음부터 끝까지 박장대소하는 스콜세이지 감독의 취향을 저격한 건 확실하다).

  다큐의 마지막 편은 '책으로 만난 세계'로 레보위츠의 독서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레보위츠는 "독서는 단순한 취향"이라는 본인의 신념을 밝힌다. 그마저도 멋졌던 것은 스스로 책벌레라 칭하는 사람이 독서의 위상을 그리 낮게 이야기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나는 책벌레야. 하지만 독서가 얼마나 좋은 행위인지 아니? 그러니 사실 나는 책을 읽지 않는 보통의 사람들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다만 그녀는 요즘 젊은 독자들이 책에서 자신과 같은 모습을 찾는데, 책은 거울이 아니라 다른 세상을 여는 문이라고 강조한다. 돈이 많은 사람만이 실제 세상에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독자는 책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따라서 독서를 하는 순간만큼은 누구나 부자가 된다는 그런 말.


  조우하는 모든 사람과 사건에 대한 직설적인 견해가 있다는 점이 참 멋진 할머니였다. 너무 개성적이라 실존 인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영화의 등장인물이라 하면 더 믿길 그런 개성의 소유자. 살면서 싸움이 싫어 적당히 살기 위해 끝없이 회색분자가 되고자 노력하는 나지만 결국 이끌리는 사람은 개인을 지켜낸 사람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준 아주 재미난 다큐멘터리였다. (회사에서 유용한 모습은 회색분자인데 실제로 매력 있는 사람은 개성파라니. 회사에서 매력 있는 사람을 찾기란 불가능하다는 뜻이 되는 걸까.)

  그녀의 에세이가 제목도 멋져 보여 얼른 찾아보았는데(Social Studies, Metropolitan Life) 한국어로는 번역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영어판 원본도 당장 구하기는 어려워 보여. 어디 눈 밝은 출판인 없나요? 빨리 다큐멘터리 보고 번역본 좀 출간해 주세요! 제발! (이렇게 외쳤더니 재출간이 되었던 파타고니아 CEO의 책을 추억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예정이다.)


  인생은 기다림과 환호로 가득 차 있다. 프랜 리보위츠의 책이 출간되었다. 신나서 작성한 독서 후기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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