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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T/MINIMAL LIFE

제로웨이스트샵 방문기 6 - 1.5도씨

by 푸휴푸퓨 2021.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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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독히도 대중교통 타이밍이 안 맞은 날이었다. 나는 오래간만에 재봉틀을 꺼내 셔츠원피스를 치마로 수선하느라 하루의 기력을 모두 소진한 상태였다. 직선박기도 손을 떨며 하는지라 간단한 리폼에 3시간이 걸렸다. 치마는 원하는 대로 완성되었는데 내 몸은 항아리 같은 것이 원하는 핏이 나오지 않았다. 이 대담한 핏이 오늘은 세상만사 내뜻대로 되지 않으리란 신호였나? 기력이 있건 없건 연휴의 계획은 빡빡해서 오늘 1.5도씨에 꼭 가야 했다.

  1.5도씨(링크)는 신대방역 근처의 작은 제로웨이스트샵으로, 집에서 버스를 한 번 갈아타면 갈 수 있었다. 모아둔 일회용품이며 우유팩, 멸균팩, 병뚜껑, 종이가방, 유리병까지 보부상처럼 이고 지고 나왔지. 나왔는데 버스가 저 멀리 가네. 다음 버스가 28분 이따 온다는 놀라운 소식에 멀리 내려주는 버스를 탔다. 환승할 정거장으로 헛둘헛둘 가니 버스 2대가 막 출발하는 참이었는데, 마침 그 2대가 1.5도씨 근처로 가는 버스임은 놀랍지도 않았다.

블로거의 본분을 잊지 않고 사진 한 장

  들고간 물건을 모두 드리고 계획했던 디어얼스 고체치약을 사고, 둘러보다 참지 못하고 내내 갖고 싶었던 아로마티카의 바디오일을 샀다. 카카오톡 선물하기에서 1000원쯤 더 싸게 파는 걸 알았지만 배송에 드는 탄소발자국을 떠올리며 그냥 샀다(이건 나중에 떠올린 핑계고 솔직히 충동구매였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멸균팩을 가져다 드린 사은품으로 알맹상점의 고체치약도 받아 감사했다. (참고로 테트라팩의 공식 이름은 멸균팩으로, 테트라는 멸균팩을 만드는 회사 이름이라고 한다.)

  가게를 들어서기 전에는 인스타에서 보고 군침흘렸던 쿠키와 아아를 마시며 1.5도씨에서 좀 쉴 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내 마음대로 되는 날이 아니지. 연휴 전날이라 쿠키 반죽이 없었던 데다 테이블도 한 개여서 커피만 사서 나왔다. 그래도 커피 맛은 기대하지 않았는데 맛있어서 좋았지. 흐느적흐느적 지하철역에 왔더니 막 출발해서 가버리는 지하철의 진동이 느껴졌다. 으하하. 집으로 향하는 마지막 버스조차 한 대 보내고 탔으니 끝내 화려한 타이밍의 날이었다.

  1.5도씨는 처음 생기고 얼마되지 않아 검색으로 알게 된 가게였는데 카페와 겸하는 작은 규모라 꼭 가야 할 필요는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더라고. 주인분이 행동력이 넘치신다 느끼며 인스타를 지켜보았는데 세상에! 우리동네 에코허브와 협업해 일회용품을 모으신다는 거야. 아름다운가게에서 일회용품 수거 캠페인을 멈춘 뒤로 집과 사무실에 쌓인 나무젓가락과 플라스틱 수저를 처리할 곳이 없었는데 기회다 싶어 결국 방문하게 됐다.

기회는 9월 한달 뿐!

  소비자가 제로웨이스트샵을 방문하게 하는 이유로 다양한 리필제품 구비를 떠올린 적도 있었는데 많은 품목을 수거하는 것도 좋은 유인책이 되겠다고 생각했다(관리에 품은 많이 들겠지만도). 나만 해도 어느 가게를 가건 제로웨이스트샵을 갈 땐 수거품목을 꼭 확인하고 최대한 많이 들고 가곤 하니까. 더불어 주인 분과 이야기를 하다 내가 사는 동네엔 제로웨이스트샵이 없는 이유로 주민들이 오래 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말을 들었다. 꾸준한 지지자가 있어야 유지될 테니 선뜻 가게를 열기 어려울만하다.

  그리하여 제로웨이스트샵이 없는 동네 주민인 나는 꾸역꾸역 짐을 들고 멀리 원정을 다니고, 집에 오는 길에 커스터드 호두과자를 사서 1.5도씨의 커피와 함께 마셨다. 집에서도 맛있는 1.5도씨 커피(고른 원두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두 가지 중 바디감이 있는 쪽이었습니다)! 대중교통이야 어쨌거나 만족스러운 연휴 첫날의 외출이었다. 1.5도씨에 포인트도 적립했으니 또 방문할 일이 있기를 바라는 바다.

한 손으로 다 들고 찍어보려던 (가상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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