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블로그를 쓰며 기억은 금방 휘발되고 기록한 대로 믿게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어떤 일을 겪었건 간에 내가 어떻게 기록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이야기. 이 점을 기억하며 이번 소동과 발령에서 내가 남기고 싶은 부분을 추려본다.
첫 회사에서의 나는 부당함에 맞서지 못하고 함께 웃었다. 사람들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는 대신 나를 그래도 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 웃음 때문에 오래 아팠다. 내가 나를 아껴주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 나를 지키려면 어떻게든 싸워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싸워야한다는 마음으로 무장한 나는 이번 회사에서 정말 싸움을 했다. 상대의 싸움 방식을 잘 알았기에 지지 않고 응했다. 그 순간의 나는 꽤 잘 싸웠다. 모든 기력을 다 써버렸지. 그게 문제였다. 잘 싸울 수 있었던 건 그때뿐이었다.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고, 다시는 같은 공간에서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무엇이건 내 잘못으로 처리해도 상관없으니 발령만 내어달라 청했다.
다행히 멀리 발령이 났다. 인수인계 전화를 하다 이 발령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지 느꼈다. 그 사람이 언급만 되었을 뿐인데도 돌아왔던 긴장감, 심장이 조여드는 느낌, 또 문제가 생기리라는 막연한 공포. 그 사무실에 계속 있었더라면 이쯤은 참아야 한다며 일상으로 치부했겠지만 이제는 평온이 일상이고, 순식간에 달라지는 온도차는 정상이 아니다.
이 발령이 공식적으로 유배임을 안다. 그것을 부당하다 느껴 나를 위로하는 직원이 많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렇지 않다. 내게는 이번 발령이 보호로 작동한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승진 순위가 밀려나도 개의치 않는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어차피 앞으로 갈 방법은 요원했고, 나서고 싶지도 않았다. 이 사태를 통해 내가 원했던 건 방어와 보호였고 물리적 거리는 그 둘을 충분히 가능케 한다. 그뿐이면 충분하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지금의 내게는 더없이 소중하다. 소요의 중심에서 벗어났다는 점도 행복하기 그지없다.
여러번 스스로에게 물었다. 가만히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내 행동을 후회하는가? 변함없이 내 대답은 “아니요”다. 승진이 밀려도 회사 내 평판이 나빠져도 괜찮았다.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도서관은 이용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내 마지막 신념도 내려놓지 않았다. 싸움을 못하는 내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덕분에 이 직업을 좋아하는 나의 마음을 지켰다.
상담 선생님은 싸우지 못했던 과거의 내가 '싸워야 한다'까지를 배웠다면, 이번에는 '싸우려면 잘 싸워야 한다'는 점을 배우면 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폭탄처럼 터뜨린 싸움이 아니라 내가 주도하는 싸움이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내게 싸움을 주도할만한 정신적 체력이 있나. 당장은 생각하기 버거운 문제지만 미래의 내가 또 투쟁해야 한다면, 32살의 내가 그에게 충분한 자양분이 되기를 바란다.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야지.
시간을 견디며 사람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했다. 애정이 없었으면 어쩔 뻔 했나. 작은 위로, 도와주려는 마음, 공감해 주는 분노까지 그 모든 것에 고마움을 느꼈다. 고마운 사람은 고마운 대접을 해주어야 한다. 받은 만큼 많이 나누고 싶고, 앞으로 힘든 일이 있는 이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족: 사실 내가 제일 손 내밀기 어려운 건 나 자신이다. 나를 지켜주려 가장 최선을 다한 사람인데 말이야. 스스로를 징징댄다 여기지 않고 잘 보듬고 아껴줘야지. 나도 모르는 곳에 생채기가 나버렸을 나. 그래도 어떻게든 헤쳐나가는 중인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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