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은 일 년에 한 번만 간다. 돈을 모으자고 결심한 몇 년 전 정한 원칙이고, 근 5년은 그 원칙을 잘 지켰다.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나면 몇 달 후 필연적으로 거지존을 지나게 된다. 엉망인 머리를 여름 핑계로 묶어가며 버텨냈다. 적당히 길어지면 풀고 다녔고, 긴 머리가 무거워 못 견딜 때쯤이면 미용실에 갈 시기가 왔다.
올해도 어김없이 거지존의 시절이 왔다. 사실 머리가 애매한 길이인 것쯤 참을 수 있다. 내가 진정으로 싫어하는 것은 정수리에 잡초처럼 짧은 머리카락들, 그리고 새로 자라나서는 자기 멋대로 뻗쳐버리는 앞머리의 잔머리들이다. 머리를 묶을 시기가 도래했나 생각하다가 나를 이렇게 방치하고 싶지 않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년에 미용실을 두 번 가면 되는데, 언제까지고 미련하게 참아야 할까.
부서 특성상 하루에도 몇 번씩 손을 씻고, 건조하니 필연적으로 핸드크림을 바른다. 핸드크림 50ml가 한 달이나 갈까. 몇 년 동안 어차피 성능은 거기서 거기라며 저렴한 로션을 주로 썼지만 최근 우연찮게 취향에 딱 맞는 핸드크림을 선물받았다. 향이 마음에 쏙 들어서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하루에 잠깐이라도 기분 좋을 순간이 침투한다는 게 얼마나 좋던지. 정가를 주고 살 필요도 없이 당근마켓에 가면 매물이 넘쳐나는데, 영 못 살 정도의 가격도 아니었다. 나를 기분 좋게 해주는 건 나뿐인데. 비교적 저렴한 매물의 게시글을 읽고 또 읽었다.
몇 년 간 립스틱은 딱 한개의 틴트만 사서 아침에 쓰고 낮에는 언니가 선물 받았지만 쓰지 않는 제품을 아무거나 얻어 썼다. 그러다가 작년 어느 날 올리브영에서 롬앤의 립스틱을 충동구매했는데, 너무 마음에 드는 거야(몇 년 만의 립제품 충동구매였는지! 몇 년 만에 고른 새 제품이 이렇게나 마음에 들다니 내 실력 어디 가지 않았다는 생각에 몹시 뿌듯했다). 롬앤에 관심이 생기면서 뷰티유튜버 개코의 영상을 가끔 보았는데 최근 촉촉한 멜팅밤에 영업당해 하나를 샀다. 살짝 나는 향도 좋고 발림성도 색도 좋아서 업무를 하다가 입술이 지워진 듯하면 슥슥 바른다. 맞아. 나는 원래 립스틱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언니가 등짝에 입술을 열 개 정도 숨겨두었냐고 했었는데. 금방 닳는 립제품을 보며 지출이 늘어나는구나 싶다가도 하루에 서너 번 입술 구경을 하는 값으로 나쁘지 않지 싶다. 마스크를 벗어서 입술이 더 잘 보인단 말이야.
일상에 잠깐씩의 만족과 행복을 더해 나를 대접하고 싶다는 말은 풀이하면 기존보다 더 내게 돈을 쓰고 싶다는 말이다. 저축도 중요하지만 소소한 기쁨도 그만큼 중요하지 않은가. 스스로 매기는 나의 가치는 얼마인가. 그런데 나를 대접한다는 말이 혹 돈을 쓰려는 허울 좋은 핑계인 건 아닐까. 지를까 싶다가도 주춤거리는 건 내 행복의 가치를 아직 정확히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만 원쯤 더 쓴다고 저축액에 심각한 타격이 생기지는 않지만 그렇게 흐른 만 원이 삼십만 원이 되어 오백만 원으로 흐를까봐 지레 걱정한다. 어디까지가 걱정인지, 어디서부터는 합리적인 소비인지 선을 잘 그어야 한다. 그래서 로션을 살까 말까. 이렇게 고민하다 누가 사버리면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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