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세상의 문은 갑자기 열린다. 왜 열리는지도 모르게,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게. 쏟아지는 문 밖의 빛을 보며 눈이 부시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도달한 곳을 둘러보면 그곳은 어디이긴 하다. 그게 어디든, 이전보다 더 좋은 곳.
1.
연초에 올해는 꼭 달리기를 제대로 해보겠노라 다짐했다. 조금씩 달리는 거리를 늘리는 중에 통증이 찾아왔다. 무릎이 내 무게는 버텨줄 수 없더라고. 이를 어째. 달리기 말고 다른 운동을 하면 더 좋았겠지만 미련이 남았다. 통증이 사라진 후 결국 인터벌 달리기를 시작했다. 인터벌은 쉬는 구간이 있어 무릎이 아프지 않다.
3분간 워밍업 걷기를 한 뒤 9로 2분 뛰고 4로 3분 걷는다. 달리기를 다섯 번 반복하고 마무리 걷기를 5분 한다. 딱 30분이 걸린다. 처음에는 8로 뛰었다가 8.5가 되었다가 이제는 9다. 어제는 9도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도를 높일까 시간을 늘릴까 경사를 높일까. 무릎은 어느 쪽을 좋아할까.
달리는 거리가 짧고 수많은 러너들에게 비견할 바도 못되지만 그래도 나는 달리기를 좋아한다. 단순한 움직임을 반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미세한 몸짓을 조정한다. 쾌청한 땀이 흐른다. 숨이 차지 않고 발바닥이 아프지 않을 때, 달리는 발은 바닥에서 퐁퐁 튕기는 기분이다. 그 기분을 오래 느끼고 싶어서 달리기가 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체육이라고는 질색하던 내가 달리기를 좋아한다고 말할 시절이 올 줄 미처 몰랐다. 몸이 가벼워지고 5km 정도는 무리 없이 뛰는 날이 오면 더 더 더 자신 있게 마음을 말할 수 있겠지. 연말에는 지금보다 나은 숫자를 만들면 좋겠다. 한 발자국 나아간 보람이 있다.
2.
평생 시를 대체 어떻게 쓰는지 궁금했다. ‘아침에 일어나 물을 한 잔 마신 뒤 책상 앞에 앉습니다. 연필을 뾰족하게 깎습니다. 좋아하는 노트를 펴고 한 시간 동안 시를 씁니다. 그게 제 시 쓰는 루틴입니다.’ 하는 시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쳐도 소용없다. 미라클 모닝을 열고 물을 한 잔 마신 뒤 책상 앞에 앉았다고 시가 적히지는 않는다. 중학생 때 마지막으로 지었던 시를 본 국어 선생님이 “초등학생이 지었다면 잘 썼다고 칭찬받을 동시 같다”는 평을 한 뒤 나는 단 한 줄의 시도 쓰지 않았다.
놀란의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려고 예습을 하다가 알쓸별잡에 빠져들었다가, 영화에 감명 받고 나왔더니 갑자기 물리학에 빠져들었다. 알쓸 시리즈를 보면서도 김상욱 교수님의 이야기는 적당히 스킵했건만. 자세를 고쳐먹고 난데없이 김 교수님의 설명을 골라서 들었다. 여러 영상 중 나를 끌어당긴 건 이상의 시가 당시 최신 물리학을 반영했을 거라는 내용이었다. 사각형 내부의 사각형 내부의 사각형 내부의 사각형. 최신 물리학을 접한 작은 나라의 인텔리가 머릿속에서 사차원을 고민하다 상념을 기록했더니 오래도록 시로 남았다.
덕분에 시는 이렇게 쓰는 것이란 깨달음이 왔다. 시상이란 이런 거구나. 여러 시인의 이야기를 읽어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 사고의 흐름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상의 생각을 이렇게 명쾌하게 이해한 건 처음이었다.
그날 이후로 저녁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끼적인다. 산문으로 구구절절 말할 내용은 아니라며 놔두었던 소재가 있었다. 시의 형식을 빌려 마음을 풀어낸다. 하나를 꺼내니 두 번째도 생각난다. 단어를 고르고 조사를 고심한다. 어제 쓴 구절을 지우고 새롭게 써보기도 하고, 지웠던 걸 다시 꺼내기도 한다. 조립하는 재미가 있다.
그리하여 갑자기 시를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 블로그를 쌓고 헬스를 쌓고 달리기를 쌓은 것처럼 시 습작을 열심히 하다 보면 몇 년 뒤에는 나름의 세계가 구축되어 있지 않을까. 즐길 거리가 늘어서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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