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10시 10분에 만나기로 했는데 네가 한 시간이나 일찍 왔다.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머리까지 잘 손질한 너는 여행이 기대되어 잠을 설쳤다고 했다. 나도 약속 시간보다 일찍 와서 같이 아침이라도 먹을 줄 알았는데, 눈치 없는 나는 시간을 잘도 맞춰 가버렸지. 여행에 설렌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이 시간이 나만 기대되는 건 아니구나.
착륙하는데 떨린다며 서로 손을 꽉 잡았다. 택시를 타고 미리 찾아둔 음식점 ‘취향의 섬’에 갔다. 제주도는 노란 귤이 한껏 열리는 시기였고, 남원읍은 더 그랬다. 취향의 섬은 손수 시공한 인테리어가 정말 멋진 곳이었다. 고사리 파스타와 흑임자리조또, 옥감자춘권을 흡입했다. 만족스러운 점심이었다.
너와 올레길을 조금 걸었다. 제주는 무려 20도여서 기모 맨투맨과 터틀넥을 들고온 나를 걱정하게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감귤을 구경하고 떡구이를 사 먹었다. 우리를 구경하는 고양이를 구경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때때로 걸어오는 사람들을 마주쳤다. 현무암 돌담과 귤나무가 온통인 길에서 서울을 잊었다.
숙소는 번화가와는 거리가 먼 토스카나 호텔로 잡았다. 온수풀이 기대되어 골랐는데, 친절한 데다 방이 넓어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수영장과 가까운 방이었지! 둘이서 미리 래쉬가드도 사두었는데, 거울 속 내 모습이 행복한 검은 돼지로 보였다. 3시간을 꼬박 채워 놀기로 전의를 다졌다.
나도 나지만 남자친구는 수영을 전혀 못했다. 벽을 잡고 발차기 연습을 시켜보려 했는데 벽을 잡고 물에 뜨지도 못했다면 알만 할까요. 반신욕을 좋아하니 당연히 온수풀에서 날아다닐 줄 알았는데, 꼬르륵 잠기는 모습에 자꾸 웃음이 났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알지. 검은 (마음만은) 물방개 듀오는 잽싸게 구명조끼를 빌려 입었다.
네가 물의 흐름에 맞춰 발장구를 치게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겨우 몸에 힘을 풀고 물에 뜨는 법 정도만 알려줄 수 있었다. 1.6m 수심에서 물을 먹고 켁켁댔지만 동동 떠다니는 재미가 있었다. 아이들은 어떻게 그렇게 수영을 잘할까. 세 시간 정도야 순식간일 줄 알았는데 바둥거리고 음식을 먹고 또 바둥거려도 시간이 남았다. 물 밖으로 나오다 사다리에 부딪혀 둘 다 다리에 피멍이 들었다. 원 없이 허우적거린 시간이었다.
비행에, 올레길에, 물놀이까지 남은 체력이 하나도 없었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는 천둥처럼 코를 골았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도 쿨쿨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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