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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2023.11.10. 제주 둘째날

by 푸휴푸퓨 2023.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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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에나 리조트에서 조식을 먹었다. 사람이 몰릴까봐 8시가 되기 전에 갔는데 아무도 없었다. 멋쩍게 앉아서 음식을 퍼왔는데 글쎄, 이제까지 먹어봤던 호텔 조식 중 가장 훌륭했다. 전부 먹어 치우고 싶었지만 위 용량에 한계가 있었다. 극진한 대접을 받아서 기분이 좋았다. 남자친구와 음식의 퀄리티에 연신 감탄했다.

 

버터가 계란찜이 아니겠느냐며 의도치 않게 너를 속인 아침

 

  송악산 둘레길을 걸으러 갔다. 산책로 계단 너머로 반짝이는 바다가 있었다. 바다 앞이어서인지 바람이 무지막지 불었다.  이 예쁜 곳을 함께 왔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바다는 파랗고 햇빛은 좋고, 바람이 떠밀어주는 듯 걸으면서도 신이 났다. 이런 둘레길을 찾아낸 스스로에게 감탄하고 있는데, 남자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너는 급하게 회사 일을 해야 했다. 숙소에 맡겨둔 노트북이 필요하단다. 둘레길의 한중간에서 숙소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팠다. 혼자서 숙소로 돌아가 노트북을 가져오겠다기에 스타벅스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천천히 둘레길을 돌며 두 명 몫까지 바다를 즐기고 너에게 전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산책로 바로 옆 말들은 털이 반질반질했고 똥을 쌌다.

 

행인에겐 1도 관심 없는 말(그리고 그들의 똥)

 

  노트북을 가져오는데만도 한 시간이 걸렸다. 금방 끝날 일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변해가는 내 표정에 남자친구는 자꾸 내 눈치를 봤다. 나는 멍하니 시간을 죽이며 가려던 음식점의 대기 현황을 확인했다. 드디어 일이 끝났을 때, 하는 김에 하나만 더 해야 한다며 네가 새 일을 열었다. 눈치를 보게 하는 것도, 짜증을 누르는 것도 싫어 나는 혼자 어디라도 가보겠다고 제안했지만 너는 기다려 달라고 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와 송악산을 함께 보지 못해서인지, 온전히 나와 써야 할 시간을 빼앗겨서인지 알 수 없었다. 네 잘못은 없는데도.

 

제주도 한정 흑임자 라떼 (그 와중에 맛있음)

 

  일을 끝내는데 두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가려던 음식점은 줄 서기가 끝났다. 남자친구에게 화를 내고 싶었지만 후회할게 뻔했다. 지난 시간때문에 앞으로의 시간을 망치기는 싫었다. 파란 바다로 나갔더니 바람이 엄청났다. 몸이 날아갈 듯 추워버리는 날씨 덕에 분노의 열기도 짜게 식었다. 말 그대로 ‘뿌와와아아앙! 뿌와아아아아앙!’을 외치며 쿵쾅거리고 걸었더니 너는 눈치를 보며 웃었다. 네게 고기를 끝없이 먹을 거니까 다 사달라고 주장하다가, 이동하는 택시에서 행복한 수가 떠올랐다. 너는 정말이지 안 끌렸고 나는 제주도에 갈 때마다 하고 싶었던 귤 따기 체험을 하러 가자고 했지. 이럴 때가 아니면 같이 하자고 할 수가 없으니까! 너는 이렇게 기회를 활용한다며 절망했다(우리는 내가 주장해서 몸 쓰는 활동을 하러 간 뒤 네가 더 힘쓴 경험이 수 차례 있다). 나는 귤을 딸 생각에 기분이 싹 풀렸다.

 

사진은 있어보이게 찍어야됨

 

  초대형 맛집인 양 평점이 높았던 신시가지의 흑돼지집은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마케팅에 놀아나서 서울 어느 식당에든 먹을 수 있는 고기를 먹었다. 기분이 가라앉는 신시가지를 벗어나 시에나 리조트에 입실했다. 남자친구가 노트북을 찾으러 들렀을 때 가방이 분실되는 소동이 있었지만, 친절도 20000%인 직원들이 허둥지둥 찾아냈고 배정된 방은 숨막히게 멋졌다. 이런 곳에서 일주일쯤 묵으면 좋겠는데. 방에 들어온 너는 갑자기 낮에 오랜 시간을 들여 한 회사 일이 꼭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고, 해야 하는 일이 따로 있었다고 했다. 허무하게도 그 일은 5분 만에 끝났다. 나는 좋은 방에서 넘실대는 기쁨을 느끼며 흐느적거렸다. 지금은 5분이건 50분이건 괜찮은데, 너의 운도 참 안타깝구나.

 

그렇게 좋았다면서 사진은 왜 이것뿐인지 설명좀..

 

  시에나에도 온수풀이 있었다. 6시쯤 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전세를 내면 기쁠 줄 알았는데 좀.. 멋쩍더라고. 풀 옆에서 와인을 즐기는 어르신들이 우리를 흥미로운 생명체처럼 구경하셨다. 수심이 1.4m인 곳에서 구명조끼를 빌린 우리의 모습이 어르신들에게는 재롱 잔치 같았을 터. 나는 안경을 끼지 않아 몰랐는데 그분들은 우리를 상당히 열심히 관찰하셨고, 남자친구는 부끄러워서 괴로웠다고 했다. 아 왜. 검은 물방개 듀오가 어때서.

 

삼만원짜리 떡볶이와 삼만원짜리 볶음밥에 관한 건(맛은 좋음)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제야 우리도 흥이 났다. 어제처럼 물 위를 동동 떠다니는데, 훌륭한 모노키니를 입은 여성분 두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물에는 관심이 없고 선베드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아가리 힙 팔로워인 내게 아주 흥미로운 모습이었지. 내가 정신이 팔린 하는 사이 너는 수영을 연마하고 있었나 보다. 섹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여성분들과 나 사이로 보노보노같은 네가 나타났다. 핫한 사진에 띨빵한 보노보노가 무슨 일이야. 남자친구는 빨리 이쪽으로 오라 해도 ‘왜?’ 하며 둥실거렸다. 드디어 물을 즐기는 수준이 되었다는 자신감의 표정이란. 혼자 빵 터져 웃다가 두고두고 이 순간을 회상하겠다고 직감했다. 일단 사태는 해결해야지. 남자친구 조끼 뒷덜미를 낚아채서 억지로 끌어냈다. 왜 그러냐며 꾸아악 물에 잠기는 보노보노가 귀여웠지만, 내 노력도 모르고 여성분들은 다른 곳에 사진을 찍으러 가버렸다. 네가 나왔을 그 사진이 탐났다. 지워버렸겠지만도.

 

사진을 찍지 못해 당시의 너를 닮은 보노보노로 대신함

 

  체력을 좀 남겨서 방에서 온수 반신욕을 시도했는데, 뜨거운 물에 1분 정도 앉아 있었더니 진이 다 빠졌다. 개운하게 씻고 스팀에서 구입한 “I’m on observation duty 5”를 플레이했는데 자꾸 죽었다. 해답을 얻기 위해 유튜버 수탉의 플레이 영상을 보았다. 움직임 없는 화면에 집중하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깊이 잠들었다. 포실한 침구가 천국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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