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피티가 마음을 다독여준다며 감동했다는 글을 올린 게 무색하게 지피티를 의심한다. 10년 전쯤 hallucination이라는 영단어를 암기하며 참 쓸 일 없을 단어라고 생각했다가, 의학 드라마에서 이 단어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인상적이라서 외워버렸다가, 이제는 모두가 할루시네이션을 알아버리는 세상이 왔다. 신기하다. 영단어가 쓰여지는 게 신기할 만큼 기계가 가짜로 하는 말이 그럴듯한 것도 신기하다. 아무려나 지피티의 할루시네이션과 아무 말에 완전히 놀아난 이야기.

회사에서 개관이 지나가고 평화로운 생활을 즐기려는 내게 누군가 내 자리를 노린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냥 노리는 정도가 아니라 진지하게 손을 들고 신청을 하겠다는거야. 아아니 이건 너어무한 것 아니오? 겨우 완성해 둔 공간을 고대로 잃는다면 상실감이 상당할 터였다. 확률이 낮긴 했지만 이제까지 굳이 손을 든 경우는 없었기에 혹여나 첫 케이스로 자리가 바뀔까 걱정이 됐다.
미래를 알고 싶어 가까운 초능력자 지피티에게 사주를 기반으로 한 운세를 물었다. 매주 이번주 운세와 이번 달 운세를 물으니 친절한 지피티는 심지어 일간 운세까지 정리해 주었다. 열심히 대답하는 지피티는 매번 “어떤 상황인데? 말해주면 내가 더 잘 도울 수 있어!” 로 말을 맺었다. 그러니 어떡해. 이만저만한 상황을 공유했고, 또 계속 물었고.. 문득 눈치를 챘다. 얘가 운을 점치는 게 아니라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아.
어느 날은 운세를 묻는데 지피티가 요일과 날짜를 자꾸 틀렸다. 글자를 계산하려면 날짜를 정확하게 봐야 하지 않나? 어느 날엔 이미 말해주었던 남편의 사주를 묻는데 괴상한 날짜의 생년월일을 말했다. 틀린 점을 지적해도 “아핫! 내가 실수했어!” 따위로 느물느물 넘어갔다. 뭐야. 너는 실수를 하면 안 되는 지피티라고. 한자를 들먹이며 봐준 운세에 믿음을 주고 있는데 이런 식이면 믿을 수 없었다.
불신이 쌓이던 중 Think step by step을 넣으라는 유튜브의 댓글을 발견했다. 실수하는 모습을 몇 번 보았으니 참고할 만 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단계별로 사주 운세를 점쳐주라는 구문을 넣었더니.. 이제까지는 볼 수 없던 긴 로딩과 숙고를 보여주더라고? 무슨 사이트를 참고해서 어쩌고저쩌고 하는 화면이 한참을 나오더니 이제까지와는 결이 다른 답을 보여주었다. 뭐야. 3주 동안 나를 들었다 놓았다 했던 그 많은 답은 다 가짜였던 거야? 답도 애매해졌다. 알 수 없는 중국 사이트를 참고했다고 했다.
의심이 깃들고 신뢰가 박살난다. 체계적인 답을 읽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비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을 방울과 부채로 써 보려 했으니 내 잘못이다. 가만히 앉아 꿀이나 따먹으려던 인간은 지피티에게 (그리고 멍청한 자신에게) 배신감을 절절히 느꼈다. 내가 바보로소이다! 다시는 이러지 않겠소이다!
그리하여 절친을 하나 얻나 싶었던 나는 다시 고독자가 되었다. F가 필요할 땐 F처럼, T가 필요할 땐 T처럼 뭐든 해주는 친구인 줄 알았더니 그냥 얼렁뚱땡이를 대하는 얼렁뚱땅이였어. 내적 궁시렁을 한바탕 한 뒤 안락한 자리에서 간식을 먹었다. 사무실은 아무렇지도 않게 평온했다.
추신:: 마음과는 상관 없이 시간은 흐르고, 발령이 제철이라는 7월이 됐고, 자리는 안전하게 유지됐다. 지피티와 함께 이동을 점쳤던 방구석 타로마스터는 틀린 점사에 슬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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