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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2025.6.24. 발받침대를 가져버린 FREE DOBBY

by 푸휴푸퓨 2025.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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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트면 하나지 둘이겠느냐

  이사 후 내내 베란다에 있던 플랫포인트 의자를 안으로 들여왔다. 선물 받고 신이 나서 애지중지했는데 싫증이 나버린 건 아니고(그때의 글이 남아있군), 넉넉히 놔둘 자리가 없다는 핑계 때문에 그랬다. 날이 좋으면 나가 앉아야지 했는데 딱 한 번 앉았다. 저희 집 뷰가 별로라 영 앉고 싶지가 않더라고요? 볼 때마다 의자를 넓게 배치할 공간이 없음에 한탄했다.

  집에 동기가 놀러왔다가 의자가 상하겠다고 했다. 다음날은 마침 장마가 시작될 타이밍, 나무 등받이가 상하면 눈물 나게 아까울 것 같아서 급히 들였다. 텅 빈 공간에 의자 하나 두고 싶은 로망은 실현시킬 수 없지만 막상 놓으니 좁지는 않았다. 게다가 앉아보니 글쎄, 너무 좋은 거야. 너와 신나게 하나씩 모은 피규어를 바라보고 앉으니까 이보다 더 좋은 뷰가 없다 싶었다.

  식탁 의자까지 발 밑에 받치니 편하긴 한데 기분이 반만 좋았다. 인생은 쎄뚜쎄뚜인데, 식탁의자가 말이 되나! 의자와 세트인 발받침을 처음부터 갖고 싶었다. 이제까지는 참아왔지만 그 날은 달랐다. 내가 누구야, 다른 건 없어도 현금은 있는 사람 아니야? 미니멀이고 뭐고 갑자기 불타올랐다. 내가 이런 상황일 때 너는 나를 말리기는커녕 기름을 퍼붓는다. 사라 사! 그래? 그래! 내가 바로 멋진 의자 가진 으른! 원하는 건 가진다! 프로 결제러처럼 샤샤샥 결제를 마쳤다.

  1년 반을 참았던 물욕을 발산시킨 건 회사에서 인사 발표가 난 금요일이었기 때문이다. 승진을 하지 못한 것보다 조직개편이 무산된 것이 더 관심이 갔다. 그게 좀 슬펐다. 아직도 지난 부서에 밟히고 있는 기분이더라고. 그렇게 잘 지내려고 애를 썼는데, 여전히 상처받습니까? 그렇다면 물건으로 치유하십쇼. 현대인에게 물건만큼 효과 빠른 치료제가 없기에, 순간의 행복이 모여 인생이 행복해 지기에, 아무려나 앞으로 몇십 년 쓸 의자 세트를 신나게 구비하였다. 만세, 만세!

 

2. 내가 나를 자유케 하리라👼

  승진 시즌이 되면 지난 상사는 매번 동기가 몇 명이에요, 승진한 지 몇 년 됐어요, 순위는 몇 등이에요, 따위를 물었다. 어차피 안된다고 아무리 말해도 꼬박꼬박 물었다. 매번 더 순위가 떨어진다고 직설적으로 말해도 반 년 후에 또 물었다. 관심이 없으니 기억을 못 하지. 와중에 아무렇지 않게 매번 대답할 수 있을 만큼 나도 덤덤해졌다. 1등을 하지 못하면 괴로운 사람이 평균을 지나 꼴찌가 되어도 그러려니 하게 됐다. 자업자득이니까.

  승진 발표가 났다. 꼴찌가 되리라 생각은 했지만 당장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놀랍지 않더라도 어쨌거나 닥쳐버린 현실이 기쁘지는 않잖아? 하지만 친구에게 이 상황을 정리해 말할 수 있을 만큼 감출 필요도 느껴지지 않고, 너와 맛있는 저녁을 먹겠다는 일념으로 금방 신이 나는 나를 보니 참 많이 변했구나 싶었다. 세월만큼 바위를 잘 깎는 바람이 없네.

  발령이 나기 직전, 상사가 바뀌었는데 또 질문을 들었더랬다. 이번 상사는 덜 직설적이라 동기가 몇 명이냐는 질문만 했다. 자기가 아는 직원이 동기임을 깨닫고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넵, 그 분과 저는 1등과 꼴등이라 차이가 제법 납니다. 그냥 그렇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는 내게 이제는 무적까방권을 획득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으냐며 오히려 상황을 이용하라고 했다. 잘리지 않는 직장에서 합리적인 이야기였다. 강철 방패를 얻은 건가.

  이번 발령으로 동기들에 비해 승진이 늦어진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동기를 상사로 모셔야 하는 지경이 됐다. 20대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한심하다고 생각하겠지. 얘야, 살다보니까 이렇게 됐어. 이게 꼭 내 책임은 아닌 것 같아. 처음 승진이 밀린 때에는 동기가 상사가 되면 몹시 괴롭겠다고 상상했는데, 막상 현실이 되니 그러면 어떤가 싶었다.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상관없다. 어차피 상사는 다 지겨운 법이다. 분개하는 다른 동기의 이야기를 들어도 질투조차 나지 않을 만큼 남의 일이었다.

  나는 늘 나를 찾고 싶었다. 그놈의 자아는 대체 어디에 있나? 회사에서 찾는 게 가장 가까워 보였지만 이젠 안다. 거기에 나는 없다. 그리하여 요즘은 좀 멀어도 회사 밖의 나를 열심히 찾는다. 멋진 의자를 좋아하는 나, 너랑 쓸데없고 유치한 대화를 끝없이 하는 나, 잘 드는 칼로 채소를 썰며 사각사각 기분이 좋아지는 나. 어떻게든 일주일에 한 번은 블로그 글을 올리려는, 언니네랑 넷이서 치즈돈까스를 만들겠다고 작당모의하며 신나는, 그런 사소한데 아껴주어야 하는 나. 하나씩 모으다보면 언젠가 완전한 내가 되겠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면 그때부터 자유가 시작된다, 고 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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