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효도까지는 못해도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으실 정도로
오래간만에 너의 본가에 다녀왔다. 틈만 나면 네가 집을 사서 편히 안착하자고 주장하는 동네다. 산도 좋고 시장도 좋은데 서울 정반대에 자리잡의 나의 회사 때문에 출퇴근이 아득하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반대할 만큼 멀어서 너도 납득은 한다.
너는 사랑 받는 둘째 아들이다. 딸이 없는 아들 둘 집에서 둘째는 딸 역할이다. 해맑고 장난을 잘 치는 너를 내가 부모님이어도 예뻐할 테다. 어머니는 네게 먹고 싶은 음식을 미리 물어봤다가 그것에 더해 한가득의 음식을 내어주셨다. 나와는 차원이 다른 재료 손질이 티가 났다. 아버지는 좋은 사케를 꺼내오셨다.
대단히 붙임성 있고 애교 있는 성격은 아니라 어른들 보시기에 내가 착 감기는 며느리는 아닐 것 같다. 나는 그냥 최선을 다했다. 딸 둘인 집에서 온 나는 아무리 너의 딸 역할이 형보다 출중하다 해도 어쩜 그리 마음을 몰라주나 놀랄 때가 많다. 별 말을 해주지 않는 아들을 대신해 근황을 말씀드리다가, 어머니의 수다를 공감해 드리다가, 좋아하시는 커피를 함께 마시며 좋다고 호들갑을 떨다가 몇 개 받고, 영양제에 관심을 보이며 사진을 찍어가다 또 한 개 받고…
네가 자리에 없을 때 어머니가 그래도 둘이 사니 재미있겠다고 하셨다. 진짜로 재미있어서 크게 동의했다. 맞다. 우리는 매일 둘이 낄낄대느라 바쁘다. 그러니 혹시나 싸울까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다음 달이면 추석이다. 그때는 무슨 밥을 먹으려나.
2.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라 춤이다
네가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꽃을 사왔다. 너는 꽃이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걸 알아서 받으면 더 기쁘다. 오로지 나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사온 꽃을 이리저리 살핀다. 꽃을 만지작거리는 나를 보며 너는 더 좋아한다. 귀여운 피규어도 맛있는 음식도 좋지만 그래도 다르다. 오직 예쁘기만 한 꽃이 주는 환희는 늘 파도처럼 밀려온다. 쓸데없는 소비를 하지 않는 네가 굳이 쓸데없는 소비를 할 만큼 나를 사랑한다고 느끼게 하니까.

꽃은 금방 시든다. 주말이 지나니 시무룩한 모습에 영 슬펐다. 그래서 좋아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래도 좋다. 꽃은 지금을 충만하게 느끼며 살고 싶게 한다. 인생은 유한하지만 순간은 영원하다.
사람들은 어째서 앞으로의 일을 이렇게까지 걱정하는 걸까요? 시간이나 인생을 하나의 직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중략) 이런 움직임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키네시스(Kinesis)’라고 불렀습니다. 키네시스의 관점에서는 어디에 도달했고, 무엇을 이루었는지가 중요합니다. 무슨 일이든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움직임이 중단되거나 예상치 못한 길로 빠지면, 그것은 미완성이며 불완전한 움직임이 됩니다.
하지만 어딘가에 도달하지 못했다 해도 그 과정의 매 순간은 완전함, 이미 완성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시간이나 인생의 길이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루어 가는 중’인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룬 것’이 되는 움직임.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에네르게이아(energeia)’입니다. (중략) 에네르게이아는 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춤은 추고 있는 순간순간이 즐거운 것이지, 춤을 끝내지 않으면 즐기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춤을 추는 것도 아닙니다.
- 기시미 이치로, 나이 들 용기 中
3. 물건이 수명을 다할 때
매일 세탁기를 돌리는 빨래 담당 덕에 집에는 빨래가 쌓일 겨를이 없다. 좋아하는 옷을 언제든 입을 수 있으니 누리는 사람은 참으로 편하다. 그러나 세탁기와 건조기를 자주 돌리면 옷감이 금방 상한다. 올여름에 처음 입은 너의 티셔츠는 이미 늘어졌고, 새로 꺼낸 네 속옷은 얇아져 구멍이 났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발견하며 깔깔대는 건 내 몫이다. 깨끗한 건 좋지만 옷감이 소모되는 건 어떻게 막을 수 있는지 아직 모르겠다.
기왕 환경을 파괴하며 공장에서 생산됐다면 그 생산품을 최대한 오래, 어떻게든 끝까지 쓰고 싶다. 그래서 말인데, 다이소에소 5000원만 주면 살 수 있는 선풍기가 제법 작고 바람이 세더라고.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게는 2018년부터 쓴 휴대용 선풍기가 있었다.
나는 거짓말을 해서 이 선풍기를 얻었다. 풋풋한 20대였던 2018년, 회사 사무실 앞에 차려진 취업박람회를 보고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고학번인 양 취업 상담을 했다(13학번 국어국문학과라고 했던가). 상담만 해도 주는 사은품이 뭐가 그리 탐났는지 모르겠다. 어느 부스에서는 양치세트를 담은 메쉬파우치를 받았다. KT에서는 휴대용 선풍기를 주었고, 선풍기 정 중앙에 그들의 캐릭터가 있었다.
받을 땐 재미있었는데 KT의 팬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나(아뇨. KT 응원 안하는데요.) 문득 선풍기를 보며 ‘ 그때 거짓말을 했었지..’하는 상념에 잠길 때는 이 선풍기를 그만 쓰고 싶었다. 하지만 성능에 불만이 없고 고장도 나지 않았으니 벗어날 길이 없지. 그렇게 쓰다 보니 최신형이었던 이 친구가 아주 구형이 되는 시기까지 와 버렸고, 급기야 다이소 물건보다도 못해 보이는 때가 왔다.
며칠 전, 선풍기가 풀충전이 된 걸 보고 나왔는데 지하철에서 버튼을 눌러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설마 이것은 아기다리고기다리던 고장인가!? 회사에 도착해 꽂아보니 역시나 풀충전이었고, 전선을 빼면 전혀 돌아가지 않았다. 갔네, 갔어. 많은 순간 아주 요긴하게 썼던 친구였다. 시원하고 섭섭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이 녀석아, 덕분에 시원했던 순간이 꽤나 많았다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생물인걸 알면서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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