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는 책을 정리하는 중이다. 온 집안을 돌면서 더이상 읽을 것 같지 않은 책들을 엄마와 골라 알라딘에 하나하나 검색해보고, 천원에 산다고 하면 아... 삼천원에 산다고 하면 와!!! 하는 과정을 이틀 째 반복 중이다. 살 때는 만원도 넘게 주고 샀으면서,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서도 오륙천원은 줘야 살 수 있는 걸 알면서도 삼천원이면 기쁘다. 그 책의 값어치가 삼천원이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종이 묶음이라는 물질은 그렇게 한없이 가치가 추락한다.
이렇게 갑자기 책 정리를 시작한 건 사실 다른 잡다한 책들 때문이 아니라, 드디어 아빠의 오래 된 자료들에 대한 처분을 허한다는 아빠의 옥음(?)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애착을 갖고 계시면서 절대 버릴 수 없다 하셨던 것들인데 어느날 갑자기 선선히 이제 그것들 좀 버리고 그 오래된 책장도 치워야 하지 않겠느냐 하셨다. 몇 번을 10년도 넘게 보지도 않는 건데 버리자고 청해 봐도 들은 체 만 체 하셨더랬는데. 드디어 그 오래된 것들을 치울 수 있겠구나~ 싶으면서도 슬프다. 마음이 변해버린 아빠가 슬프다.
아빠가 버리지 못하게 하셨던 것은 대학교 때 전공 책을 시작으로 그 후 삼십여년 간 직장 생활 및 여러 교육을 받으면서 모은 모든 자료들이었다. 그건 그냥 단순한 책은 아닌데, 아빠의 젊음과 열정이 다 녹아있는 그 것들을, 군데군데 멋진 아빠의 글씨체가 남겨진 오래된 추억이자 기록들을 하나하나 꺼내 버리자니 마음을 아리다. 그깟 종이들에 뭐 그렇게 열심히 이름은 다 써놓으셨나. 왠지 아쉬워진 엄마와 내가 확인을 하고 또 해도 아무 것도 필요 없으니 다 버려도 괜찮으시단다.
그 책들과 함께 아빠가 놓은건 무엇일지 나는 짐작도 되지 않는다. 요즘 들어 인생의 다음 장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느낌이 부쩍 든다. 은퇴 후를 생각하시는 것도, 좋지 않은 건강 상태 때문에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 있을까 걱정하시는 것도 나는 감히 무어라 말을 건네 볼 수도 없는 먼 영역이다. 그 머릿속 생각들이 밝은 것만 같지는 않아서 더 짐작이 안된다. 짐작하기 무서워서 피한다.
정리해 꺼내는 책들이 나에게는 그냥 종이가 아니라 볻받고 싶은 아빠의 열정으로 보이지만 아빠께는 그냥 종이묶음으로 보였으면 좋겠다. 아빠의 삶은 그곳이 아니라 여기, 아빠 부인과 딸들의 행복함에 있어요. 덕분에 편안했고 지금도 행복합니다. 아빠도 이제부터는 짐만 지지 마시고 같이 편안하게 웃었으면 좋겠다. 요즘 아빠에게 되도 않는 농을 자꾸 건네는 이유도 이것 때문인가 싶다. 나랑 같이 웃자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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